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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떻게 늙어 가야 하는지 아는 것이야말로
삶이라는 위대한 예술에서 가장 어려운 장이다.”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
흰머리는 천천히 피어난다. 드문드문 새치에서 시작해 희끗희끗 귀밑을 파고들다 슬금슬금 정수리로 올라가며 중원을 장악한다. 은빛 중년이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탓일 게다. 인생 후반전에 들어서는 중년은 생일이 더 이상 반갑지 않다. 삶도 계절처럼 순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든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이런 사실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불로초를 구하던 진시황의 고사부터 최근 눈부시게 발전해가고 있는 유전자 연구나 생명복제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생명의 영속성을 갈구하는 데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노화현상이 두드러지게 되고 특히 갱년기에 들어서면 누구나 신체변화를 절감하게 된다.
노령인구의 부양을 경제·사회적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대응법이라고 할 수 없다. 노년에 닥친 개인이 인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인생론적 차원의 접근법 또한 필요하다. 특히 ‘노인’은 있어도 ‘원로’는 찾아보기 힘든 사회가 된 지 오래인 우리 현실에서 잘 늙어가는 지혜를 터득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부키, 2015)는 이런 우리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가완디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늙음’과 ‘죽음’이다. 이렇게 둘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먼저 늙음에 대해 말한다. 노화에 성공한 사람은 편안하게 죽음을 맞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생에 대한 미련 때문에 불안과 공포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일단 노인 소리를 듣기 시작할 때는 자신이 노년기에 접어들었고 멀지 않아 죽음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여한 없는 일생을 살아왔다면 죽음을 준비하는 문제는 비교적 쉽게 풀리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노화는 항시 보편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생명체에게 있어서 다른 특별한 과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죄가 아니듯, 늙어감 역시 잘못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노년의 위축되고 초라한 모습을 편안한 심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음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절대 고독이므로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이기가 전혀 쉽지는 않다. 현대 의학이 발달한 덕택에 수명을 오래 연장할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현대 의학은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하는 데 거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러나 가완디는 의학적 싸움에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와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다’라는 희망적 기대에 의문을 가진다.
암 투병 중인 저자의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방사선 치료를 받았지만,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생명유지만을 위한 치료를 멈추고 호스피스를 택한 그는 거의 마지막까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의사들은 노화과정을 자연스러운 삶 일부로 보기보다 ‘질환’으로 취급해 치료하려고만 한다. 고작 한 달을 더 살기 위해 환자는 병실에서 죽음과 고통스러운 전쟁을 선택한다. 수술에 성공하더라도 남은 생만 비참해질 뿐이다. 의사는 환자를 살릴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이며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의료인 입장에서는 죽음을 돕는 일보다 개인의 우선순위를 도출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더 어렵다. 의사인 가완디는 의학적 충동과 개입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는 상황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고 고백한다. 환자의 고통과 죽는 순간을 가까이 보는 의사의 고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노년의 가장 큰 고통은 고독과 소외이다. 자식이 보험이 아닌 세상이 되어 이제는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노인들이 많아졌다. 이러한 노인들은 세상과 시대를 원망하고 자학하며 후회와 절망 등 해로운 감정으로 노화를 가속하고 있다. 환자나 주변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노화가 슬프고 믿어지지 않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성장과 노화는 한 뿌리에서 시작된 것, 우리는 그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모르는 척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읽어낸 노년은 그래서 참 아프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선택해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자신의 가치와 믿음을 찾고, 연장된 생애를 보다 의미 있고 소중하게 인식하여 심리적 성숙 안정을 꾀할 수 있어야 한다. 부담을 주는 값비싼 수술로 생명을 조금 늘리기보다는 환자를 잘 보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생명을 연장하려는 인간의 욕심은 죽음을 유예하는 일일 뿐이다. 우리 모두 공평하게 한 살씩 나누어 가질 것이다. 주름은 더 깊어질 것이고, 몸은 더 약해질 것이다. 그 주름과 그 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늙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이렇게 책 한 권에서 나는 배운다. 늙음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을 잘 살아내기 위한 제일 나은 방법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