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막에 싹튼 열정』
(Une Passion dans le désert, <인간 희극> 제1부 풍속 연구 '군대생활 장면')
발자크의 <인간 희극> 제1부 ‘풍속 연구’는 총 여섯 가지의 ‘장면’으로 분류된다. ‘사생활 장면’, ‘지방생활 장면’, ‘파리생활 장면’, ‘정치생활 장면’, ‘군대생활 장면’, ‘시골생활 장면’이다. 발자크의 대표작인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외제니 그랑데》 등은 제1부에 포함되어 있다. ‘정치생활 장면’은 아직 단 한 편도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피에르 바르베리스의 《발자크》(화다, 1989)에 ‘정치생활 장면’ 수록작 <Z. 마르카> 일부가 인용되었지만, 이것만 가지고 작품의 특징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군대 생활 풍경’에 발자크의 처녀작 <올빼미 당원>이 수록되어 있음에도 이작품 또한 번역되지 않았았다. 그나마 유일하게 번역된 작품이 바로 『사막에 싹튼 열정』이다. 분량이 짧은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외국 작가들의 단편소설을 모은 《거짓말에 관하여》(중명, 2000)에 수록되었다. 네이버 책 정보에 검색하면 《거짓말에 관하여》에 관한 책 소개를 확인할 수 있다. 마크 트웨인, 안톤 체호프, 데이비트 허버트 로렌스, 도스또예프스끼 등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발자크의 『사막에 싹튼 열정』은 이 책 맨 마지막에 나온다.
작품의 화자는 애인과 함께 동물원을 구경하고 난 후에 동물도 인간처럼 감정을 느낀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애인을 설득하기 위해서 화자는 동물 감정설을 믿게 된 계기를 밝힌다. 과거에 화자는 동물원 쇼를 구경하다가 한쪽 다리가 절단된 늙은 병사를 만나면서 신비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병사가 들려준 이야기를 화자가 애인에게 들려준다. 병사는 한창 젊은 시절에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이집트 원정에 참전했다. 그는 이집트 원주민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으나 구사일생 탈출에 성공한다. 프랑스군 야영지를 찾으려고 광활한 모래사막을 헤매다가 임시 거처로 정한 동굴 속에 휴식을 취했는데, 하필 그곳에서 표범을 만난다. 병사는 표범이 자신을 공격하여 잡아먹을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병사의 걱정과 반대로 표범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사에 다가가서 반려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고 장난을 친다. 병사가 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표범은 더 좋아했다.
페르낭 크노프 「스핑크스 또는 애무」 (1896년)
사자 머리만큼이나 큰 표범의 머리는 여성스러운 우아함을 띠고 있었고 맹수의 잔인성을 속에 감춘 채 체구는 호리호리한 여성의 몸매처럼 잘 빠져 있었다. 한마디로 사막의 표범은 와인을 마신 네로 황제처럼 기분 좋은 듯 쾌활함을 풍기고 있었다. (『사막에 싹튼 열정』 중에서, 260쪽)
표범을 향한 경계심이 사라지게 되자 병사는 여성 같은 표범에게 ‘미뇽’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병사는 표범이 잠들면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표범은 병사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병사 곁에 조금이라도 떨어지지 않는다. 병사가 모래 수렁에 빠졌을 때, 표범이 그를 구출하기도 한다. 표범의 은혜에 감동한 병사는 죽을 때까지 표범과 같이 지내기로 한다. 이 사건 이후로 병사는 표범에 여성의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인간과 표범의 평화로운 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갑자기 표범이 야생 본능을 지닌 이빨을 드러내면서 병사의 다리를 문다. 병사는 살고 싶은 마음에 칼로 표범의 급소를 찌른다. 표범의 공격으로 병사는 다리 한쪽을 잃어버렸지만, 애지중지하게 여겼던 표범을 죽인 행동에 죄책감을 느낀다. 극적으로 구조된 병사는 전 세계를 누비면서 항상 가슴 속에 표범 가죽을 품고 다닌다. 그러면서 표범과 함께했던 사막이야말로 지구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예찬한다.
발자크가 글을 썼던 시절에는 실제로 동물 감정설이 하나의 과학 이론으로 각광받고 있었다. 스위스의 관상학자이자 의사인 요한 카스파르 라바터(1741~1801)는 <관상학 소고>라는 책에서 동물과 인간의 감정과 성격이 서로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을 과학적으로 비교한 찰스 다윈보다 더 먼저 나왔다. 그러나 라바터의 관심은 동물학이 아니라 관상학이었다. 만약에 그가 동물 연구에 과학적으로 심혈을 기울였다면, 다윈처럼 그의 이름이 명예롭게 동물학 연구사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라바터가 쓴 책은 유럽 전역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관상학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라바터는 얼굴의 표정이나 형태를 통해서 감정을 정확히 읽어내려고 했다. 그의 관상학은 생리학, 해부학 등 당시에 새롭게 주목받는 학문을 총망라한 것이라서 그누구나 믿을 수 있는 그럴싸한 정설로 자리잡았다. 발자크도 라바터의 이론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라바터의 관상학뿐만 아니라 프란츠 요제프 갈(1758~1823)의 골상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발자크는 사람의 외면을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그 사람의 내면까지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리학적 관찰로 인간의 속성을 파악하려고 했다. 이러한 생각을 반영하여 쓴 작품이 바로 <결혼 생리학>이다. 발자크는 자신의 작품 곳곳에 등장인물을 관상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나귀 가죽》(문학동네, 2009)에서 라파엘은 자신에게 엄격한 금욕생활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 심술궂고 깐깐한 인상으로 묘사한다.
“큰 키에 메말라 홀쭉이며, 면도날같이 예리한 얼굴에 안색은 창백하고, 말씀은 항상 짤막하게 하는데다 노처녀처럼 심술궂으며 고위 행정관료처럼 깐깐한 그런 양반이었네. 아버지의 부성애는 나의 발랄하고 유쾌한 생각들을 굽어보듯 감시하고, 납관 속에 가두어버렸네. (...) 나는 학교 다닐 때 선생보다 아버지를 훨씬 더 무서워했어.” (《나귀 가죽》 중에서, 139쪽)
소설 결말에 병사는 사막의 아름다움이 어떤 건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사막의 아름다움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할 뿐이다. 이 작품은 다른 발자크 소설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낭만주의적 성향이 나타난다. 낭만주의자들은 이국적 풍경에 매혹되었고, 동방 여행에 대한 동경심을 문학 및 예술작품의 모티브로 삼았다. 리얼리스트 발자크도 한때 낭만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사막을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간직한 곳으로, 그곳에 사는 표범을 매혹적인 관능미를 가졌으면서도 때로는 야만적으로 변하는 '사막의 여제'로 묘사했다. 에드워드 사이드였다면, 자신의 책에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동양을 그려낸 문제 소설로 이 『사막에 싹튼 열정』 을 추가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