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나의 서양사 편력 - 전2권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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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황제(黃帝) 시대의 전설에 의하면 거울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작은 통로가 있었다고 한다. 이 통로를 통해서 거울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왕래하면서 평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거울 세계의 사람들이 인간의 세계를 급습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인간은 황제의 비범한 능력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 황제는 통로를 막아버리고 침략자들을 거울 속에 가두어버렸다. 그리고 거울 세계의 사람들에게 인간의 행위를 똑같이 따라 하는 벌을 내렸다. 그들 본래의 모습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보르헤스의 《상상동물 이야기》(까치, 1994)에 나온다.

 

나 아닌 다른 사람, 내 나라 아닌 다른 나라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 정부와 극우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저지른 자신들의 잘못을 미화하고 정당화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역사 왜곡을 둘러싸고 일본 내의 입장은 이렇다. 하나는 우리 역사를 쓰고 가르치겠다는데 참견하는 한국과 중국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하는 것은 일본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는 미래를 조망하는 거울이 된다.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새 장을 확인할 수 있다. 따져보면 일본의 역사 왜곡보다 우리 자신의 역사 왜곡이 더 심각하다. 정치권의 이념 대립은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에 이르러 급기야 역사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정치와 이념, 역사인식이 철저히 둘로 나뉘었다. 보수와 진보 진영은 역사마저 이념의 잣대에서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면서 공통의 역사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현실을 비춰주고 미래를 조명하는 거울의 용도를 상실한 지 오래다. 과거는 불변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고,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만큼 인간은 거울의 세계(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로 나뉜 인간은 역사에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 그대로 반영되기를 원한다. 대화와 소통의 통로를 원천 차단하여 역사를 정치적 이념 가치에 맞게 부합하여 정당화한다. 역사를 정치적 이념의 울타리 안으로 완전히 가두는 것이다. 이런 역사를 학생들은 암기하면서 공부한다. 역사를 유연하게 바라보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사고력의 기회를 잃게 된다. 이러다 보니 역사는 ‘죽은 학문’이 된다. 역사는 이미 완료된 고정불변의 실체가 되고 역사학은 그런 대상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니, 역사학의 내용도 변화할 가능성이 없어지게 된다. 한마디로 한번 완성이 된 역사학의 내용은 정설로 굳어지게 되어, 이후 지속적인 연구 가능성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책을 통해 알게 된 역사는 이미 그것을 저술한 학자들이 연구한 것이니 우리는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편견이 생긴다.

 

무엇보다 심각한 사실은 우리나라 역사교육에 서양사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마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역사교육에서 서양사는 푸대접을 받고 있다. 자국사와 서양사를 모두 필수과목으로 포함한 일본의 역사교육과 대비된다. 전공의 경우에도 역사는 서양사가 짜놓은 틀 위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고대-중세-르네상스-근대로 이어지는 공식을 암기하면서 배운다. 이런 문제가 고착되면 서양사를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학생들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우려가 생긴다. 또 초보적인 서양사마저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면 국가적 망신에 가까운 무지의 태도가 드러날 수 있다. 나치의 하겐 크로이츠 문양이 있는 복장을 착용한 걸그룹 가수의 실수는 전 세계적으로 뉴스거리가 된 적이 있다.

 

《나의 서양사 편력》은 서양사를 공부하고 싶은 독자도 볼 수 있는 99개의 작은 서양사 거울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고대, 중세, 근대, 현대 그리고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의 시대를 볼 수 있는 총 4개의 거울 방으로 만들어졌다. 독자는 관심 있는 거울 방을 골라서 노크해서 들어갈 수 있다. 서양사 거울은 독자가 여행할 수 있는 통로다. 이 책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과거의 사실들을 총망라해서 공부하는 기존의 역사 교육을 답습하지 않는다. 그런 역사가 현재에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영향을 미치면서 전체를 만들고 또 각자를 만들어 왔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 역사도 우리의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결 고리 내지는 상호 연관성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가령 ‘새로운 로마’를 위해 ‘구(舊) 로마’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파괴한 로마인들의 반달리즘(vandalism)을 통해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반달리즘을 조명한다. 외국 관광객들이 찾는 ‘새로운 서울’을 만든다는 핑계로 서울시(당시 서울시장은 이명박)는 역사가 있는 종로 피맛골을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했다. 그 이후로 피맛골은 예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곳을 지키던 예술가들은 하나둘씩 떠났고,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맛집들도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면서 사람들의 발길도 뚝 끊어졌다. 서양사는 역사분쟁을 헤치고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공존에 이바지할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에라스뮈스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학문을 연마한 선구자적인 ‘세계 시민’이었다. 유럽연합(EU)은 1987년 국경과 종교, 언어를 초월해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학문을 연마했던 에라스뮈스의 이름을 딴 ‘에라스뮈스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EU 회원국 대학생들은 재학 기간에 1∼2학기를 다른 유럽 국가의 대학에서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다. 한국과 중국, 일본도 아시아판 에라스뮈스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상호교류를 통해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 아니라 ‘동북아인’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여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세대의 등장을 기대할 수 있다.

 

5개의 거울이 있는 밀턴의 방으로 들어가면 권력화한 종교가 지배하는 17세기 영국의 사회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거울상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종교를 배타하는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 개신교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또 권력 앞에 굴하지 않는 밀턴의 강인한 정신과 양심은 국회에서 ‘밥그릇 전쟁’하느라 여념 없는 국회의원들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 왕정복고에 의해서 명예가 상실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실명이 된 밀턴은 궁핍한 상황에 처해있어도 자신의 공화주의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훗날 제임스 2세가 될 요크 공 제임스와 나눈 대화는 권력 앞에 주눅이 들지 않는 밀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요크 공 제임스는 밀턴을 직접 찾아가 실명한 상태가 왕정을 무너뜨리는 혁명 활동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이는 밀턴의 행적을 비꼬는 의도가 담긴 질문이었다. 그러자 밀턴은 한 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만일 전하께서 저의 실명을 신이 진노해서 받은 천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신은 전하의 부친이신 선왕께 훨씬 더 불쾌하셨을 겁니다. 선왕은 신의 심판으로 머리를 잃었으니까요.” 제임스 2세의 선왕은 의회를 무시하는 전체 정치를 펼치다가 청교도 혁명으로 참수당한 찰스 1세였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정 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과거에 벌어졌던 상황이 후대에 의해 끊임없이 재평가되며 그것의 가치가 변화하여 인식되는 유연한 학문이 바로 역사학이다.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역사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나가는 방안을 모색하고, 잘못된 상황을 반성하는 계기가 만들어진다. 역사의 거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역사를 바라보는 이런 인식은 역사에 대한 반쪽짜리 이해에 불과하다. 역사에 정치가 절대로 개입해선 안 되며, 현재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 역사는 정치권력을 흉내 내면서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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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독서가 2015-03-19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나니, `읽고 싶어요`릉 누르게 되네요. 좋은 책 많이 알려주세요.

cyrus 2015-03-20 20:59   좋아요 0 | URL
참고문헌이 없어서 아쉽지만,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독서가님도 좋은 책 많이 알려주십시오. ^^

안티고네 2015-03-21 21:1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참고문헌? 2권 274-278쪽에 나와 있는데요~

cyrus 2015-03-21 21:15   좋아요 0 | URL
안티고네님. 지적 감사합니다. 오늘 2권에 참고문헌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제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안티고네 2015-03-28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cyrus 님. 무시할 수도 있는 댓글에 즉각 대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