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시 1분 전 -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순간
마이클 돕스 지음, 박수민 옮김 / 모던타임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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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미국의 외교정책 중 가장 참담한 실패 중의 하나가 1961년 4월 17일에 있었던 피그스 만 침공이다. 게릴라로 위장한 쿠바 난민들을 쿠바의 피그스 만에 침투시켜 카스트로 공산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CIA의 낙관적인 말만 믿고 피그스 만에 상륙했던 쿠바 난민들은 카스트로 혁명군에 의해 생포되거나 사살되었다. 피그스 만 침공 계획은 처음부터 성공 가능성이 없었다. 카스트로 정권이 난민들에 의해 무너질 만큼 허약하지도 않았고, 성패와 관계없이 누구든 CIA를 그 배후로 지목하게 돼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케네디 정부의 외교적 손실은 막대했다. 국제사회에서 망신당한 것은 물론 미국이 반정부군을 지원한 것이 드러나, 케네디 대통령의 참신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쿠바는 소련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쿠바는 결국 소련의 핵미사일을 끌어들임으로써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했다.

 

케네디는 미국 코앞에 핵무기가 배치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일촉즉발의 위기를 타개하는 동시에 피그스 만 침공 계획 실패로 상실된 강대국으로서의 명예와 국민의 신뢰를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로부터 면전에 굴욕을 당할 정도로 케네디의 입지는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 정책실패를 통해 케네디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피그스 만 침공 계획은 ‘집단 사고’가 만든 무모한 정책 결정이었다. ‘집단 사고’란 정책 결정에 참여한 사람들 간에 친밀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논쟁을 통해 좋은 결정을 도출하기보다는 쉽게 한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버리는 현상이다. 이러면 잘못된 결정이 나올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

 

공교롭게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피그스 만 침공 계획에 참여했던 정책 결정자들이 케네디 옆을 지키고 있었다. 딘 러스크 국무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맥조지 번디 안보보좌관 그리고 법무부 장관이자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애칭은 바비)까지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는 데 있어서 케네디는 이들을 믿고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치밀한 전략회의를 했다. 하지만 서로 워낙 친했던 이들은 침공계획의 무모함을 집어내지 못했다. 전략회의가 수차례 열렸지만, 누구도 반대편에 서서 한 번쯤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쿠바의 반정부 군인들을 침투하면 카스트로 혁명군을 투항시킬 수 있다는 성급한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케네디에게는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이 필요했다. 문제점만을 지적해서 집단적 사고를 훼방하는 악마의 적임자로 자신을 가까이 지켜봤던 바비를 선택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상황을 분석한 일부 역사가들은 바비가 그 일을 훌륭히 수행했고, 그 덕분에 즉각 공습보다 온건한 해안봉쇄로 선회했던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평가를 했다. 지금도 쿠바 미사일 위기의 교훈을 논하면 젊고 용기 있는 미국 대통령과 대통령의 동생이 소련의 핵 위협을 놀라울 정도의 냉철한 판단으로 절묘하게 막아낸 것으로 묘사한다.

 

 

 

 

흐루쇼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핵무기를 초강대국간 경쟁에 있어서 한 가지 요소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전쟁을 원하면 “당장 해봅시다”라며 거칠게 몰아쳤다. 회담이 끝난 뒤 케네디는 <뉴욕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에게 말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흐루쇼프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습니다.” (26쪽)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공습을 옹호했던 사람은 바비였다. 그는 직함만 법무부 장관이었지 역할은 정부 내 2인자나 다름없었다. 오래전부터 쿠바 혁명군을 소탕하고, 카스트로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CIA와 펜타곤 간부들을 긴밀하게 만나 비밀 위원회를 주관하기도 했다. 바비는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흐루쇼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난처해진 자신과 대통령의 상황이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쿠바를 침공하고 싶은 마음은 형보다도 무척 강했다. 36살이라는 새파랗게 젊은 국무장관은 대통령의 귀에 쿠바 침공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귓속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대통령은 동생보다 이성적이었고, 자칫 더 큰 위기를 자초할 수도 있었던 침공 결정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었다. 케네디 정부의 역사를 기록한 아서 슐레진저 2세는 반카스트로 작전에 관여했던 바비의 활동을 ‘가장 눈에 띄는 바보짓’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측근들은 바비의 ‘바보짓’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대통령의 동생이자 백악관의 두 번째 실세의 뜻을 함부로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일 동안 이어진 쿠바 미사일 위기를 새롭게 조명한 마이클 돕스는 《0시 1분 전》에서 대통령과 바비의 관계를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고 비유한다. 케네디가 차분한 성격이라면, 바비는 쉽게 감정이 격앙되고 승부욕이 강한 거친 성격이다. 케네디도 마음만 먹으면 당장 쿠바 기지에 대한 공습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바비의 모습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케네디의 이면이기도 하다. 대통령으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던 바비는 애초에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해줘야 할 ‘악마의 대변인’에 어울리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주연 중에 주연”이자 “편집증이 있는 과대망상증 환자”였을 뿐만 아니라 “깜짝 놀랄만한 인물”이자 “정열적이고 머릿속이 복잡한 천재”였다. 세 명의 지도자 가운데 카스트로만이 특별한 임무를 위해 역사가 선택한 구세주적 야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137쪽)

 

그런데 바비 못지않게 ‘가장 눈에 띄는 바보짓’으로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 간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카스트로였다. 흐루쇼프는 공산주의 국가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 핵미사일을 빌미 삼아 쿠바에 엄포를 놓았다. 이미 먼저 터키에 미사일을 배치한 미국의 태도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흐루쇼프는 미국 앞에서 위축되지 않으려는 자세가 필요했고,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여 핵전쟁으로 유도하도록 만들게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미국과 소련이 충돌하는 핵전쟁이 전 세계의 파괴를 부르는 ‘치킨 게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나라가 서로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에 쿠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는 엄청난 치킨 게임에 승리하기를 갈망했고, 이 게임에 한발 뒤로 물러나는 겁쟁이(chicken)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 게임에 승리하면 쿠바 내부에 있는 정치적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 간의 팽팽한 눈싸움에 쿠바의 카스트로는 눈치 없이 끼어들었고, 소련의 비호를 받아 당당해진 카스트로는 미국을 쓰러뜨리려고 핵전쟁을 불사하는 기세였다. 흐루쇼프도 쩔쩔 맬 정도로 카스트로는 야심이 강했다. 하지만 핵미사일을 둘러싸고 복잡하게 얽힌 양국의 정치적 계산을 이해하지 못했다. 질색하는 이념만 달랐을 뿐이지 카스트로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빅 터짓슨 장군과 비슷하다. 반대로 미국에는 호전적인 성격의 커디스 르메이 장군이 있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미사일 위기가 지난 뒤에 개봉했는데 빅 터짓슨의 실존 모델은 르메이다)

 

《0시 1분 전》은 단순히 쿠바 미사일 위기의 교훈을 되새기기 위한 책이 아니다. 혼돈으로 치닫기 일보 직전인 쿠바 미사일 위기의 순간들 하나하나 조명함으로써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재연한다. 마이클 돕스가 재구성한 13일간의 신경전에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늘날 위기를 극복하는 데 성공한 승자로 기억되는 미국은 극도로 긴장한 모습을 보였으며 소련은 공산주의와 쿠바를 지켜내기 위한 방어적 자세로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세워 무모한 도박을 감행했다. 쿠바는 일촉즉발의 분위기에 휩쓸려 미국을 로켓으로 날려버리고 싶어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냉전기의 분열된 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최악의 역사다. 이때는 표면적으로 어떤 협상도 오갈 수도 없었다. 흐루쇼프는 팽팽하게 맞서는 대치 상황을 ‘너무 단단하게 묶어서 묶은 사람조차 풀지 못하는 매듭’에 비유했다. 그야말로 전 세계는 핵무기가 달린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묶이고 말았다. 이미 갈 데까지 가게 된 위기 상황을 해소하기에 늦은 감도 있었지만, 미국과 소련은 냉전의 매듭을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풀어주기를 원했고, 계속 눈치만 보고 있었다. 눈치 싸움이 길어질수록 대립의 긴장감은 날로 높아져만 갔다. 설상가상 쿠바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린 알렉산더 대왕처럼 치킨 게임에 승리한 영웅이 되고 싶었다. 위기를 해소하는 방안을 요구하는 친서를 내놓는다는 것은 치킨 게임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흐루쇼프는 풀릴 방법이 없는 이 냉전의 매듭을 오래 놔두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미국에 먼저 친서를 보냈다. 하지만 오늘날 역사는 냉전의 매듭을 풀려고 앞장서서 해결한 나라로 미국을 제일 먼저 기억한다. 흐루쇼프의 친서를 ‘개소리’라고 헐뜯었던 르메이의 발언과 전쟁을 지지하는 강경파의 모습들은 어느 순간부터 싹 잊혀 버렸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한 공식적인 역사에 세계의 영웅으로 변신하기 위한 미국의 과장된 신화가 섞여 있다. 최근 쿠바는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흥분에 들떠 있다. 전 세계의 가슴을 쓸어내렸던 13일의 악몽이 너무 쉽게 잊어버린 듯하다. 인류의 멸망으로 향하는 ‘운명의 날’ 시계는 잠시 멈춘 상태다. 핵무기가 완전히 폐기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13일의 악몽은 재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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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27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최근에 베트남 역사책을 읽는데 마지막 장이 베트남 전쟁이에요 거기서도 냉전이랑 쿠바랑 엮이는데 정말 극단가지 가던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도 뭐 나아진점은 없지만 말이에요.

cyrus 2015-03-01 09:53   좋아요 0 | URL
지금은 북한과 IS가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고 있는데 과연 어떤 결과가 초래될 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