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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여는 꽃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59
김형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9월
평점 :
대설이 지났다. 동장군은 벌써 무섭게 우리를 밀어붙인다. 겨울에 돌아다니지 말고 겨울잠이나 자는 게 최상책이라는 걸 실감하고 있다. 올해의 마지막 달도 넘어가지 않았는데도 생명 움트는 소리를 엮어서 뿜어내는 봄기운이 그리워진다. 올해 겨울은 짧다던데 멀리서 느리게 오는 만큼 봄의 발걸음은 느릴 것이다. 누군가 걸어오는 발소리 같기도 한 봄비는 생명의 고동을 울리는 신호이다. 봄비 오는 소리라는 어감은 이래서 한결 다정하고 푸근하고 여유가 있다.
봄비 오시자
땅을 여는
저 꽃들 좀 봐요.
노란 꽃
붉은 꽃
희고 파란 꽃,
향기 머금은 작은 입들
옹알거리는 소리,
하늘과
바람과
햇볕의 숨소리를
들려주시네.
눈도 귀도 입도 닫고
온전히
그 꽃들 보려면
마음도 닫아걸어야겠지.
봄비 오시자
봄비 오시자
땅을 여는 꽃들아
어디 너 한번 품어보자.
(「땅을 여는 꽃들」 전문, 10쪽)
김형영 시인의 「땅을 여는 꽃들」은 우리가 평소에 보지 못했거나 무관심했던 부산한 봄의 태동을 묘사한다. 봄비는 땅에 가서는 “일어나!”라면서 주룩주룩 봄비는 땅을 간질인다. 겨우내 얼어있던 땅이 열리는 순간, 잠자던 어린 꽃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꽃들은 매서운 겨울을 이겨 낸 후 꽃망울을 터뜨리고,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새로운 꽃을 피우려고 낯설게 느껴질 법한 하늘과 바람과 햇볕의 숨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봄은 우리를 많이 기다리게 했지만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요즘 세상에 우리는 느림의 미학이나 미덕에 익숙지 못하다. 한때는 봄비 맞으며 걷던 낭만도 있었다. 옛날 선비들은 다정한 벗이라도 불러 한 잔 술을 나누며 정담에 젖는 운치를 즐겼다. 우리는 봄이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신비스러운 자연의 몸단장 채비를 눈으로 확인하는 여유를 잃어버렸다. 시인은 자신을 기다리는 우리를 위해 약속을 지킨 봄에게 화답하기 위해 봄비 오는 날에 맞춰 땅에서 솟아나는 꽃들을 품어본다.
내가 날마다 오르는 관악산 중턱에는
백 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요
팔을 다 벌려도 안을 수가 없어서
못 이긴 척 가만히 안기지요.
껍질은 두껍고 거칠지만
할머니 마음같이 포근하지요.
소나무 곁에는 벚나무도 자라고 있는데요
아직은 젊고 허리가 가늘어서
내가 꼭 감싸주지요.
손주를 안아주듯 그렇게요.
안기고 안아주다 보면
어느새 계절이 바뀌고
십 년도 한나절같이 훌쩍 지났어요.
이제 그만 바위 곁에 앉아
쉬었다 가는 게 좋겠지요.
(「쉬었다 가자」 전문, 18쪽)
시인은 모든 자연을 안아준다. 차별하지 않고, 더불어 껴안는다. 자연을 볼 수 있을 만큼 맘껏 보고, 자연을 들을 수 있을 만큼 맘껏 듣고, 자연을 말할 수 있을 만큼 맘껏 말하는 시인의 태도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 시인은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만물의 변화 속에 아름다운 공평함을 발견한다. 관악산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소나무는 벚나무를 위해 자리를 내어준다. 벚나무의 향긋한 봄 내음은 사시사철 녹음을 유지하는 소나무에 비하면 이 세상에 잠깐 머물다가 지나가는 존재뿐인데도 말이다. 관악산을 지나가는 시인은 소나무와 벚나무가 너무나 기특해서 사랑스럽게 안아본다. 함께 사는 세상이다. 공생하는 관계일 뿐이다. 자연의 영성은 누구에게나 살 수 있도록 포근하고 너그럽게 해준다. 시인도 자연의 영성을 온몸으로 느껴본다.
운명을 견뎌내느라
꿋꿋이 서 있는 너를 볼 때마다
내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내 생각은 너무 가벼워
몸 둘 바를 모르겠기에
나는 때때로 네 앞에서 서성거린다.
너를 끌어안고서
네 안으로 들어가려고,
너를 통해서
온전히 네가 되어보려고.
(「나무를 위한 송가」 전문, 76쪽)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devenir)라고 부른다. ‘되기’는 차이를 가로지르는 실천적 활동이다. 자연의 영성을 감지한 시인은 ‘사람-이기’를 넘어 ‘나무-되기’(자연-되기)를 향해 시도한다. ‘사람-이기’였다면,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자란 나무의 처지를 영원히 모른 채 살아갈 것이다. 내가 나무이고, 꽃이고, 향기가 될 수 있는데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헛것이 된다.
내가 나무이고
내가 꽃이고
내가 향기인데
끝내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헛것을 따라다니다
그만 헛것이 되어 떠돌아다닌다.
나 없는 내가 되어 떠돌아다닌다.
(「헛것을 따라다니다」에서, 90~91쪽)
‘나무-되기’는 서로 다른 두 대상(사람, 나무)의 차이를 뚫는 창조적 소통의 행위가 된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기’로만 남은 헛것은 세상이라는 자신의 영토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자이다. 자연을 거리낌 없이 안을 줄 아는 시인의 자세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연의 영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합일하는 접점을 만든다. 자연과 인간, 그 두 주체가 하나로 엉키고 포옹하는 것. 그 과정에서 생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물 속에 ‘어떤 최고의 생’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벤야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