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클래식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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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302] 성

 

 

 

 

‘내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어쩌다 이곳에 서 있는 거라면 약간 절망적인 경우가 되겠지.’ 문득 이런 생각이 K에게 떠올랐다. (프란츠 카프카 『성』, 26쪽)

 

 

 

카프카가 구축한 ‘성’의 세계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근거를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무력한 인간들을 지배하고 고립과 단절, 절망이 퍼져 있다. 주인공인 K는 정부의 측량기사로 일하게 되어 성 아랫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성에 들어가는 것도, 마을에 머무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곤경에 빠진다. 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K는 결국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한다. 환상적인 성의 풍경 이면에는 이 같은 악몽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이처럼 상징으로 가득한 작품을 한 가지 주제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스럽지만, K의 상황이 당시 사회의 심각한 관료주의와 그 폐해를 풍자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요행히 성에 들어간 K가 우연히 민원서류들이 무너질 정도로 높이 쌓인 채 방치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야말로 한 인간의 생사가 달린 절실한 문제들조차 서류철 속에 사장되고 있는 끔찍한 광경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좌절시킨다.

 

작품에서 주인공이 단지 K라고만 불린다. 그것은 K가 맞서는 관료조직 속에서 그가 어떤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닌 하나의 의미 없는 단순한 기호 K로서 존재할 뿐이다. K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성에서는 절박한 개인의 사정은 행정 처리에 있어 고려의 요소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비단 작가가 경험한 현실만은 아니라는 것이 '성'의 핵심 주제일 것이다. 근대국가에서 공무를 수행하는 관료는 존재할 수밖에 없고, 법과 절차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모든 일에 서류가 필요한 것도 어쩔 수 없다. 관료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K의 운명은 모든 시민의 운명이 될 수 있다는 데 그 끔찍함이 있다.

 

관료제는 대단히 합리적이고 체계적이지만, 그 조직 속의 각 개인은 거대조직 내에서 급격히 무의미해지고, 단순히 비인격적인 기계의 톱니바퀴로 전락하게 된다. 막스 베버는 개인의 삶이 규제와 관리적 억압이라는 철창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러한 관료조직 속에서 인간 삶의 무의미함을 잘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작가가 바로 카프카다. 베버가 당시 관료제의 모습을 이론적으로 고찰했다면 카프카는 관료제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카프카의 작품은 그 시대 점증하는 관료화에 대한 불안을 극적으로 표현했다고 평가받고 있지만, 이것으로 다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압축적이고 따라서 폭넓게 해석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미로와 같다. 카프카 작품의 주인공들은 미로와 같은 세계를 헤맨다.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는 자신의 서른 살 생일 아침 돌연 죄명도 모른 채 낯모르는 사나이들에게 체포되어 무언지도 모르는 소송 때문에 1년 동안 동분서주 고민하다가 서른한 번째 생일 전날 밤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느닷없는 사건 속에 던져져 당황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상황 속을 맴돌다가 영문도 모르고 사라져 간다. 그들에게는 탈출구가 없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카프카의 소설 자체도 뭐가 뭔지 제대로 모르겠고, 이해를 돕기 위해 읽어본 해설서도 알듯 모를 듯하다. 카프카의 장편소설, 특히 ‘고독 3부작’(『소송』, 『성』, 『소송』)을 도전하려면 따분함을 참고 끝까지 읽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얻은 것은 있다.카프카는 ‘절망과 불안의 기운이 감도는 미로를 만든 고독의 작가’ 라는 점이다.

 

독자도 K처럼 카프카가 만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의미한 미로의 세계에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 심지어 ‘고독의 미로’를 만든 카프카는 테세우스가 크레타의 미궁을 탈출할 수 있도록 몸에다 실을 매준 아리아드네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미로의 설계자 다이달로스와 같은 상황이 되고 만다. 카프카는 자신이 설치한 'Kafkaeask'(카프카적인) 미로에 갇혀 버린 채 세기말의 문명으로부터 고립된 현대인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탈출을 시도해보지만, 구원의 날개가 상실된 이카루스의 비극적 운명처럼 카프카는 쓸쓸히 최후를 맞이한다. 날개가 위축된 한 마리의 까마귀(Kafka)에 불과했다. (카프카는 자신과의 대화를 책으로 펴낸 구스타브 야누흐에게 날개가 잘린 까마귀라고 말했다)

 

K가 머무는 마을은 미로로 이루어진 거대한 감옥이다. 마을에서 성으로 통하는 길은 없다. 성으로 통하는 것 같은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서 언제나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성 안에서 헤매는 K를 도와주는 자도 없다. 그가 가까이 오면 마을 사람들은 두려워하거나 철저하게 외면하거나 회피한다. 그의 측량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서 찾아온 조수 또한 K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조수 예레미아스는 K의 유일한 믿음이자 한때 성의 권력자 클람의 애인이었던 프리다를 호시탐탐 노린다. 그는 K와 프리다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행동도 한다. 그렇지만, 프리다 역시 아리아드네 같은 존재가 되지 못했다. K와 프리다를 연결해준 사랑이라는 이름의 실은 마을을 탈출하고 성으로 향할 수 있는 희망의 실이 될 수 없었다. 프리다는 점점 성으로 가기 위한 욕망이 강해지는 K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정작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 성의 실체를 알고 싶은 K의 외로운 투쟁이 처량하다. K는 자신이 거대한 감옥에 갇힌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을 묶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을 끊지 못한다.

 

“예컨대 나는 지금 집에 가죠. 그렇지만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에요. 실제로는 특별히 나를 위해 설치된 감옥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이 감옥은 정말 보통 시민의 집과 유사하고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감옥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견고하죠. 그 때문에 탈출 시도는 차츰 줄어들죠. 눈에 보이는 사슬이 없다면, 사슬이 끊어질 수 없는 법이에요. 따라서 감금은 아주 평범한 일상의 존재, 지나치게 안락하지는 않은 일상의 존재로 체계화되어 있어요. 모든 것이 튼튼한 재료로 만들어지고 견고한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그것은 지옥으로 추락하는 승강기예요. 사람들은 승강기를 보지 못하죠. 그러나 눈을 감으면, 사람들은 승강기가 자신들 앞에 굉음을 내고 솨솨 소리를 내는 것을 듣게 되죠.” (구스타브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 문학과지성사 / 129~130쪽)

 

마을 사람들은 성을 알고 싶은 K의 욕망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성은 함부로 범접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권력의 세계다. 마을과 전혀 다른 미지의 세계다. 성의 관리가 내린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권력자를 모독하는 것과 같다. 권력자를 복종하지 않는 자는 살아 있어도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단절된 망자가 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런 생활이 평범하게 보일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권력자가 만든 사슬로 영원히 자유를 속박한다. 그러나 견고하게 만들어진 사슬이 끊어지더라도, 마을 사람들 그리고 K도 이곳에서 절대로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 그곳은 ‘지옥으로 향하는 승강기’와 같다. 권력의 사슬을 풀고 자유를 갈망하는 자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나 다름없는 무서운 고독과 절망이다. 지금쯤 성으로 향하는 마을 입구에 가면 이런 글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 『신곡: 지옥 편』제3곡,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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