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는 영리한 동물입니다.
아프리카 토인들이 이 영리한 원숭이를 생포할 때
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원숭이가 제일 좋아하는 쌀을 넣어
나뭇가지에 단단히 매달아 놓습니다.
가죽 자루의 입구는 좁아서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갈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얼마 동안을 기다리면 원숭이가 찾아와
맛있는 쌀이 담긴 자루 속에 손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곤 쌀을 가득 움켜쥐고는 흐뭇해합니다.
그런데 쌀을 가득 움켜쥔 원숭이는 아무리 기를 써봐도
그 자루 속에서 손을 빼낼 수가 없습니다.
놀란 원숭이는 몸부림치며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손을 펴서 놓아버리기만 하면 쉽게 손을 빼내 저 푸른 숲 속을
다시 자유롭게 누비며 살 수 있으련만, 슬프게도
원숭이는 한줌의 쌀을 움켜쥔 손을 펴지 못한 채 울부짖다가
결국 토인들에게 생포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손을 펴라.
놓아라 놓아버려라.
움켜쥔 손을 펴라.
한 번 크게 놓아 버려라.
(박노해, ‘손을 펴라’)
아프리카 원숭이는 한줌의 쌀과 생명을 너무나 허무하게 맞바꿔 버렸다. 생소한 덫이 쌀을 움켜쥔 손을 결박해버리는 바람에 원숭이는 크게 당황하여 쉽게 빠져나오는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원숭이를 노리는 덫은 생각한 것보다 특별하게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진짜 덫은 원숭이의 마음에 자리 잡은 ‘욕심’이다. 자신이 만든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 한 편의 우화가 연상되는 박노해의 시 ‘손을 펴라’는 욕심을 움켜쥔 채 손을 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을 원숭이로 비유했다.
우화나 동화 속 원숭이는 꾀가 많은 영리한 동물로 등장하지만, 눈앞의 이익만 집착하는 우매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조삼모사’(朝三暮四)다.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워낙 오랫동안 원숭이를 길렀으므로 그는 원숭이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으며 원숭이 또한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원숭이들의 숫자가 많았던 데다 식욕까지 워낙 왕성하다 보니 먹이를 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저공은 원숭이들의 양식을 줄이기로 했다. 하지만 원숭이들이 불평할 것이 두려워 먼저 원숭이들과 상의하기로 했다. 그는 집안의 모든 원숭이들을 불러 놓고는 말했다. 처음에는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로 주기로 제안하자 원숭이들은 그렇게 먹어도 배고프다고 불평했다. 원숭이들의 항의에 저공이 “이제부터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고 대답하자 원숭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세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났다고 여긴 원숭이들은 그 제서야 뛸 듯이 기쁜 것이다. 실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는데 원숭이는 저공의 꾀에 속아 넘어갔다.
‘조삼모사’에 나오는 원숭이들은 저공에게 농락당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쉽게 길들여지고 마는 수동적인 모습 또한 보인다. 영원히 우리 안에 갇혀서 아침, 저녁으로 저공이 주는 도토리 7개를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로 식사하는 것이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최상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피터르 브뤼헐 「두 마리 원숭이」 1562년
어리석은 원숭이 이미지는 플랑드르 출신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언뜻 보면 두 마리 원숭이를 묘사한 평범한 그림이다. 원숭이들은 좁은 창의 난간 위에 쇠사슬로 묶인 채 지내고 있다. 창밖으로 시야가 탁 트인 항구가 보인다. 오른쪽 원숭이 등 뒤에 속살을 먹고 버린 호두 껍데기가 흩어져 있다.
브뤼헐은 쇠사슬에 묶인 원숭이들을 그린 이유가 무엇일까? 어느 부유한 사람이 기르는 애완용 원숭이를 그렸던 것일까? 브뤼헐의 그림은 우화나 속담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에 화가가 전달하려는 어떤 특정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원숭이 그림에 관한 해석 중 가장 설득력이 높은 것이 플랑드르 속담을 그렸다는 설명이다. “개암나무 열매 한 개 때문에 재판소에 간다”라는 속담은 별 것 아닌 열매 때문에 죄를 짓고 마는 어리석은 태도를 조롱하고 있다. 속담의 의미를 브뤼헐의 그림에 대입하면 우리는 두 마리 원숭이가 쇠사슬에 묶인 채 살게 된 배경을 상상해볼 수 있다.
두 마리 원숭이는 길에 떨어진 호두를 발견한다. 그런데 호두는 한 마리 원숭이만 먹을 수 있다. 원숭이들은 호두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싸운다. 서로 뒤엉키면서 싸우는 사이에 마침 지나가는 사냥꾼이 손쉽게 그들을 포획한다. 새와 조개의 싸움으로 제3자인 어부가 덕을 보는 ‘어부지리’(漁父之利) 고사와 유사하지만, 어쨌든 호두 한 개를 둘러싼 원숭이들의 욕심은 그들에게 덫이 되어 인간에 잡히고 만다. 이제 예전처럼 자유로운 야생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부지리’ 고사를 따온 그림에 대한 해석은 개인적인 상상으로 꾸민 것이다. 지금도 브뤼헬의 원숭이 그림을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해석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딱 이 그림만 봐도 원숭이들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마리가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창의 난간이 감금된 상황을, 이것과 대조적으로 창 밖에 펼쳐진 항구 풍경은 두 마리 원숭이의 과거, 즉 자유로웠던 삶과 세계를 상징한다. 하필이면 하늘 위에 두 마리 새가 훨훨 날아다닌다. 영원히 난간 위에 살아야하는 원숭이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왼쪽 원숭이의 표정은 예전처럼 자유로운 생활로 돌아가지 못한 마음에 자포자기한 심정이 드러나 있다. 오른쪽 원숭이도 마찬가지다. 그는 항구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차마 하늘 위로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지 못한다. 오히려 회피하는 듯하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가 부럽다. 이제야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호두 한 개 때문에 욕심으로 눈이 먼 어리석음을 후회한다.
그러나 자유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박탈된 존재는 끊임없이 고통 받는 것이 아니다. 저공의 원숭이처럼 현실을 그대로 순응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자유를 찾기 위한 어떠한 해결책도 생각하지 않은 채 말이다. 오히려 탈출을 시도하다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탈출한 죄로 예전보다 먹이를 적게 주거나 더 좋지 않은 곳에 살 수도 있다. 최악의 결과는 죽음이다. 그만큼 생존을 위한 탈출 시도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오랫동안 쇠사슬로 결박된 채 좁은 감옥 생활에 적응하면 어느새 탈출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다. 탈출하고 싶고, 살아서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무모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탈출 실패가 초래하는 끔찍한 결과를 원하지 않는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 나오는 원숭이 ‘빨간 피터’는 철창을 벗어나기 위해 원숭이의 본성을 벗어던진다.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 처음에 피터는 좁은 철장에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탈출이 불가능하게 되자 원숭이의 정체성을 포기한다. 인간이 된다면 자유를 되찾을 수 없더라도, 우리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악수하는 법과 술·담배를 배우고 말하는 법을 배우면 됐다. 간단히 말해 쇼무대에서 인간흉내를 내어 그나마 우리 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 인간의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점점 더 인간의 모습에 가까워진 피터는 서커스단의 일원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피터는 학술원 회원에게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보고하는 내내 구원의 길을 모색하는 자신의 모습에 한껏 자부심에 고취되어 있다.
그러나 작품의 이면을 살짝 들여다보면 피터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원숭이일 뿐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피터는 여전히 원숭이의 상태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관객 앞에서 묘기를 부리는 공연하는 것은 인간에게 조련당하는 원숭이의 모습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원숭이 피터는 인간으로 거듭난 행복한 원숭이가 아니라 인간에게 사로잡혀 자유분방한 정체성을 상실한 가련한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피터는 ‘하겐벡 증기선의 중간 갑판에 있는 우리 안에’ 갇히게 되는데 여기서 ‘하겐벡’은 그 당시 유명한 동물원을 세운 회사이다. 독일 출신 회사 설립자의 이름을 딴 하겐벡은 육식, 초식동물의 구분 없이 공존하는 파노라마 형태의 동물원을 만들었다. 피터가 제아무리 인간처럼 흉내를 내도 그는 하겐벡 소속의 동물일 뿐이다.
피터는 억압적인 현실에 순응하면서 참된 자아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탈출구를 스스로 포기했다. 철창의 자물쇠를 물어뜯을 수 있는 이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시도를 하지 않는다. 인간이 먹이로 가져다주는 호두 껍데기를 원활하게 부수는데 사용한다.
“지금의 제 이빨로는 이미 일상적인 호두까기에도 조심해야만 합니다만, 그 당시에는 틀림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문의 자물쇠를 물어뜯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들 무엇이 얻어졌겠습니까? 제가 머리를 내밀자마자, 사람들은 저를 다시 잡아서 더 고약한 우리 안에 가두었겠지요.” (카프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중에서, 도서출판 솔, 263쪽)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피터는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어려운 현실 속에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이 생기게 마련이다. 우습게도 피터는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사람이 주는 호두를 부수는 용도로 사용했다. 호두 때문에 탈출 시도를 쉽게 체념하고 만다. 그 호두가 피터의 탈출 시도를 방해하는 덫이 되었다. 자물쇠를 물어뜯어보는 시도를 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피터는 인간 흉내 내는 어리석은 원숭이가 되었다. 피터는 철창 우리 생활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절망 속에 갇힌 상태에서 희망의 탈출구를 찾기 위해 서성거리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