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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를 지치게 하는 것들
라파엘 보넬리 지음, 송소민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몹시 굶주린 여우가 먹을 것을 찾아 숲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그때 나무에 높이 달린 포도송이가 보였다. 여우는 포도송이를 따려고 몸을 세우고 앞발을 위로 뻗은 채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포도송이에 발이 닿지 않았다. 여우는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위로 솟아올랐다. 닿을락 말락 하긴 했지만 역시 포도송이를 따진 못했다. “내가 솔직히 재주가 없어서 저 포도송이를 따지 못하는 건 아냐. 가만 생각해 보니 저 포도는 덜 익어서 먹지 못할 것 같아.” 여우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이솝 우화의 여우처럼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보다, 현실을 왜곡함으로써 심리적인 위로와 안정을 찾는다. 즉 인간은 ‘자기합리화’의 달인이며, 때로는 자신이 왜곡한 현실을 정말로 믿어버리는 ‘자기기만’의 능력까지 발휘한다.
짝사랑하던 사람을 떨구고 “성격이 안 맞는 것 같아”, 휴대전화를 잃고는 “어차피 바꾸려 했던 고물인데...” 등등 하며 쓰린 속을 애써 달랜 기억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두고 심리학에서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자기합리화라는 방어기제가 발동했다고 분석한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는 바라는 욕구가 있으나 원만히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자기합리화 및 자기기만은 일종의 심리적 진통제일 뿐, 실제적인 성장과 발전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 나쁜 행동을 저지르게 되면 그 죄를 마음속에서 밀어내느라 애쓴다. 사람은 심한 자책에 빠지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에 등을 돌린다. 타인을 탓하기도 하고, 사회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의 죄책감은 조금씩 자취를 감춘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모토 아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행위는 결국 인간관계의 파국을 부른다.
환경보호 강경론자인 어느 아버지. 그는 스포츠카를 산 뒤 자주 타는 일이 없을 테니 환경을 지킨다고 말하며 가족을 어이없게 만든다. 10대 청소년은 늦은 밤 골목에 있는 자동차의 사이드미러 20개를 발로 차서 깨놓은 뒤 "내 발이 다쳤다"며 고발하겠다고 우긴다. 어떤 남성은 여성 정신과 의사의 실력이 형편없어서 자신의 자살 시도를 막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라파엘 보넬리의 『우리의 관계를 지치게 하는 것들』은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이를 부인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 속에 소개된 9명의 문학작품 주인공(파우스트, 스크루지, 미하엘 콜하스, 라스콜리니코프, 장발장 등)의 이야기와 45개의 실제 상담 사례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마주하는 이야기다.
책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비슷한 기질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완벽주의다. 우리는 누구나 ‘완벽한 나’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완벽주의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성숙한 수준의 즐거움과 자신의 만족을 위한 완벽주의라면 오히려 그 사람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문제는 허점을 보이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가 살아 있다는 느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 완벽함을 추구한다. 미숙한 나르시즘적 요소도 있다. 강박적인 완벽주의는 노이로제로 이어진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죄를 자신에게 가하는 위협으로 느껴 매우 사소한 허점에도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적 반응을 경험하지 못해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자신의 정신 건강은 물론 신체적 건강까지 망칠 수 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척 간단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나코프의 고해처럼 말이다. 심리학자 융은 고해가 인간의 정상적인 욕구라고 말한다.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잠시 심리적 부담을 더는 일에 불과하며 관계 회복을 위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만 새로운 행동의 여지가 생긴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죄를 고백할 수 있고, 고백을 통해 죄를 갚고자 하는 동경을 갖고 있다. 용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하찮은 일로 치부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당한 부당함으로부터 해방되는 최적의 상태를 말한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완벽할 수 없듯이 다른 사람도 완벽할 수 없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서 완벽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완전한 자로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로 인식할 때 이해와 용서가 가능하다. 용서의 밑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나 관계가 간절히 유지되기를 원하는 게 깔려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