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기온, 습도 등의 날씨 변화는 사람들의 정서에 민감한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봄이 되면 들뜨고, 여름에는 짜증나고 공격적이 되며, 가을과 겨울에 감각과 사고가 또렷해지고 집중력이 높아지는 등의 현상은 바로 햇빛의 강도와 호르몬 분비 및 뇌 구조 기관들의 작용과 상관관계를 갖는 과학성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원리가 날씨로 인한 우발적 범죄 예방과 소비자 심리 연구에 크게 기여할 정도라고 한다. 한줄기 햇살, 바람 한 점에 마음이 흔들리는 여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다른 날,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분처럼 각기 다른 계절의 같은 풍경을 담아낸 그림도 많은 느낌의 차이를 전달한다. 날씨와 계절, 시간 등에 의해 변하는 대상에 대한 느낌을 가장 열성적으로 관찰하고 표현했던 화가로 클로드 모네를 떠올릴 수 있다.

 

 

  

 

 

클로드 모네  「양산을 쓴 여인」  1886년

 

 

주로 자연 풍경을 묘사하는데 적극적이었던 모네에게 「양산을 쓴 여인」 3점의 인물화는 드문 주제였지만 ‘빛을 사랑했던 화가’라는 별칭만큼 빛을 좇는 그의 붓놀림이 경쾌하게 살아있는 작품이다.

 

인상주의 화법은 마치 부서지는 햇살을 받아 반사하는 사물의 색채감을 묘사한다. 혼합하지 않은 여러 색채를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 놓고 착시현상을 일으키듯 인간의 시선 속에서 용해되어 빛이 터지는 듯한 효과를 낳는 것이다. 자연의 변화에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이 화사한 빛이 맑게 퍼지는 모네의 캔버스 위에서 또 다시 여리게 흔들리고 있다.

 

 

 

 

 

 

 

 

 

 

 

 

 

짧은 붓 터치가 만들어 낸 새털구름과 풋풋한 풀 무더기들이 여인을 받쳐 안는다. 이내 여인의 치마폭을 감싸고도는 바람이 빛과 어둠, 구름과 풀무더기에 자연의 역동성을 불어넣어 준다. 화가는 하늘빛과 잡초의 일렁임을 바람에 맡김으로서 조화의 극치를 추구한다. 바람이 하늘과 대지로 나타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배하도록 함으로써 여인이 안고 있는 불확실성을 극대화하지만, 멀찍이서 여인을 바라보는 어린 신사의 시선, 바로 모네의 사랑에 찬 눈빛을 등장시킴으로써 그림 전체의 안정감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그림에 가난한 예술가의 작품에의 열정과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클로드 모네  「양산을 들고 있는 카미유와 아들 장」 1875년

 

 

두 점의「양산을 쓴 여인」을 그리기 전에 모네는 양산을 쓴 여인을 모델로 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아들인 장 모네와 나오는 그의 아내 카미유다. 모네만큼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화폭에 자주 담은 화가도 드물다. 그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무려 56점의 작품에서 카미유를 화폭에 담았다. 모네는 다른 모델은 마다하고 오직 카미유만을 불러들였고 카미유도 청년의 순수함에 이끌려 즐거운 마음으로 아틀리에를 방문하곤 했다. 둘은 낮에는 화가와 모델로 만났고 밤에는 연인으로 만나 떨어질 줄 몰랐다.

 

꿈같은 행복의 연속이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젊은 커플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카미유와의 동거 이후로 큰아들 장을 임신했지만 모네의 식구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모네가 동거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의 집에서 약간의 보조금을 보내줬는데 1870년 카미유와 혼례를 올린 다음부터 아예 송금을 끊어버렸다. 견디기 힘든 고통의 세월이 그의 사랑을 시샘이라도 하듯 앞길을 가로막았다. 며칠 동안 맹물만 마시며 넘기는 때도 있었다.

 

 

 

 

클로드 모네  「정원의 여인들」  1866~1867년경

 

“저는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지금 작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 이주헌 『화가와 모델』 중에서, 175쪽)

 

그러나 가난의 세월 속에서도 모네의 창작욕은 더욱 뜨거워졌다. 카미유를 향한 사랑의 열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1866~1867년에 제작된 「정원의 여인들」에 나오는 네 명의 여인은 모두 같은 사람이다. 바로 카미유이다.

 

1871년부터 모네의 그림이 인기를 얻게 되면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여느 예술가들이 그렇듯 모네 역시 셈이 흐렸다. 그는 이런 꿈 같은 현실이 마냥 계속될 줄 알고 돈을 물 쓰듯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그를 후원한 화랑이 재정난을 겪게 되면서 수입은 순식간에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 카미유는 가난한 시절의 낙태 후유증을 앓고 있었지만 병원비를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빚을 끌어들였지만 생활비와 치료비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사의 수술 권유도 비용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이때부터 모네는 새로운 거처를 마련,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의 부인이자 그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적이 있었던 알리스 오슈데의 식구들과 한 지붕 아래 생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슈데는 예전에 모네를 흠모했던 여인이다. 모네와 카미유의 연애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카미유의 사진과 편지를 모두 불에 태워야 한다고 협박할 정도로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슈데는 허약해진 카미유를 정성을 다해 간호해주었고 그녀가 임종할 때까지 끝까지 지켜주기도 했다.

 

카미유는 그렇게 가난 속에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서서히 무너져갔다. 카미유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879년 3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곁을 지키고 있던 모네는 카미유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클로드 모네  「카미유의 죽음」 1879년

 

“내게는 너무도 소중했던 여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이제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나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시시각각 짙어지는 색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친구 클레망소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주헌 『화가와 모델』 181쪽)

 

「카미유의 죽음」을 살펴보면 임종 순간에 느껴진 감정의 표현이라고 말했던 모네의 말과는 달리, 그가 후에 여러 차례 터치를 하여 세심하게 매만진 흔적이 보인다. 푸른색에서 흰색으로 점차 창백하게 변하는 그녀의 얼굴은 곳곳에 분홍색이 가미된 긴 붓 터치로 그려진 베일에 싸여있다. 어찌 보면 영원히 자신 곁을 떠나려 하는 연인의 마지막 이미지를 보존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양산을 쓴 여인」그림 두 점은 카미유가 죽은 지 7년 후에 그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카미유가 죽은 후 재혼한 알리슈의 딸 쉬잔이 카미유의 빈 자리에 서 있었다. 먼저 떠나간 그녀를 그리워한 것일까. 얼굴이 묘하게 흐릿한 것을 보면 카미유를 모델로 삼았을 때의 연작을 재현하면서 그녀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 담긴 듯하다. 카미유가 살아있을 때 양산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그린 1875년의 작품과 비교하면 밝은 색의 자연 풍경은 여전하지만 카미유의 이목구비는 흐릿하기만 하다.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영혼의 모습처럼. 어쩌면 카미유가 사무치게 그립지만 세월에 씻기어 생김새가 흐릿해진 것일지도.

 

카미유는 모네에게 사랑과 창작의 원천이며 힘들고 어렵던 시간마다 힘과 용기를 주는 존재의 근원이었다. 카미유만이 그의 영원한 모델이자 그의 작품에 표현된 빛 그 자체였다. 하나의 작품이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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