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베이컨  「자화상」  1969년

 

 

20세기 최대의 중심 이슈는 인간이었다. 인류는 신과 자연에 대해 탐구하고 과학과 물질문명의 발전을 위해 마치 기차가 달리듯 역사의 레일 위를 열심히 달려왔으나 어느 날 갑자기 방향을 잃고 자기 혼돈에 빠졌다. 인간은 자기 외적 요소에서 해답을 구할 수 없고 끝내 문제는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베케트의 소설에서처럼 인간은 고도를 기다리며 “지금 어디인가? 지금 누구인가? 지금 언제인가?”라고 묻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어있었다.

 

 

 

 

 

 

 

 

 

 

 

 

 

 

 

 

미술에서 이런 전후의 절망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인물이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그는 경마훈련사인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제도권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성(性)에 대해서도 아주 부끄러운 기억의 성장배경을 갖고 있었다. 베이컨은 미술과 철학 그리고 법학에도 뛰어났던 그는 동성애자였기에 남자와의 관계를 혐오스럽게 여긴 부모님으로부터 쫓겨났으며, 프랑스, 영국, 유럽을 돌아다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고, 후원자를 만나 명성을 얻게 된다.

 

16세에 집을 떠나 베를린과 파리를 방황하며 실내장식공으로 생계를 꾸려나간 그에게 파리에서 본 피카소 전시회는 생을 바꾸어 놓아 1929년 런던에서 스스로 배운 화가의 길을 걸어 나갔다.30세를 넘어서야 수줍음벽을 겨우 이겨낼 수 있었지만 도박과 음주벽은 그의 일생을 늘 따라 다녔다.

 

 

 

 

루시안 프로이트  「세폭화, 조지 다이어를 애도하며」  1971년

 

 

파리에서 전시회 전, 동성 연인인 조지 다이어의 자살로 인해 그의 모습과 죽음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그려나간다. 소리 없는 사물의 목소리를 느끼고 그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죽음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여 아름다운 즐거움과 쾌락을 포기한 억제된 욕망의 댓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자극하고 각성시키려 한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특히 영화가 시작되는 맨 앞에 베이컨의 그림 두 점이 등장한다. 그 두 점의 그림이 각각 한 번씩, 그리고 세 번째 쇼트에는 두 그림을 동시에 나란히 등장한다.

 

 

 

 

 

프랜시스 베이컨  「이사벨 로손의 초상화를 위한 연구」  1964년

 

 

절규하는 듯한 노랑색 벽과 맑은 초록색 바닥, 그 위의 도발적인 오렌지색 매트리스에 길게 누워있는 남자와 등받이가 있는 어두운 녹색조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또 한 남자. 두 사람 모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뭉개져 있다. 그것은 그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던 화가,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과 「이사벨 로손의 초상화를 위한 연구」였는데 모두 1964년작이다.

 

그것들은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에 더없이 적절한 그림이다. 이 영화는 1973년 개봉 때 정면누드와 왜곡된 섹스행위로 상영금지가 되어 15년 뒤에나 해금이 된, 한국에서는 24년 뒤에야 비로소 개봉되었다. 그러나 정작은 외설적이지도 그다지 에로틱하지도 않은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고독이 압도한 영화였다. 쟌느의 총에 맞아 쓰러져가면서도 베란다 구석에 씹던 껌을 붙여두고 죽어가는 말론 브란도의 얼굴은 영락없는 베이컨의 초상을 연상하게 된다.

 

 

 

 

 

프랜시스 베이컨  「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  1966년 

 

 

「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도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인간의 살아 있는 현실'을 다루는 화가이다. 그의 주제는 영국 예술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금기사항을 위반하고 있으며 인간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직시하는 철학만 같다. 「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에는 그의 유년이 보인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성장배경이란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의 부모는 정착하지 않고 영국과 아일랜드를 오가며 살았고 끊임없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각각의 나라 안에서도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외할머니의 집 같은 어떤 특정한 장소들에 늘 애착을 갖고 있었는데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피리에 있는 그 집에서 살았다. 그 집은 정원을 마주보고 있는 모든 방들이 둥글게 구부러져 있었는데 꽤 큰 집이었다고 한다. 그가 그린 여러 그림들에는 곡선 모양의 배경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유년의 그 방들을 떠올린 것이었다.

 

이 그림의 천정에 걸려 있는 전구의 움직이는 술 장식만 보아도 초상의 공간 배경이 나선형이다. 이것들이 극도로 단순, 간결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물은 그와 반대로 더욱 거친 형상이 부각되어 보인다.

 

「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은 마치 빌로드천 같은 자주색 바닥과 보랏빛 벽, 그리고 갈색 천정과 원근법에 따라 처리된 남보랏빛 문을 배경으로 무언가 말을 하며 앉아 있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베이컨 자신의 말이 그 답변은 아닐까. 분명히 우리는 육신이다. 우리는 미래의 시체인 셈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의 고통과 외로움, 절망, 절규 그리고 공포의 감정들을 이성을 배제한 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해낸다. 그는 초상화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야만적이면서 격렬하고도 왜곡된 모습으로 진화시킴으로 고립된 형태를 나타낸다. 그는 비극적인 현실과 혐오스러운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나이프를 사용하고, 유리에 비치는 반사광을 이용, 실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사진과 다양한 사진 수집을 이용하여 내면의 초상을 그리는 기법 등으로 인간에 대한 충격적이고 비관적인 내면의 이야기를 연출한다.

 

 

 

 

프랜시스 베이컨  「누워있는 인물」  1959년

 

 

「누워 있는 인물」은 방에 갇혀 있는 절망의 한 인간을 뒤틀린 모습으로, 절규하듯, 쓰러지듯, 자포자기하듯, 아니면 튀어나가서 거역하려는 듯한 여러 이미지로 그려놓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절대적 상황아래 놓인 외로운 홀로의 존재라는 인간 실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그림 속의 인물은 공간에 의해 보호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갇혀져 있는 느낌이다. 그가 누워 있는 듯한 침대는 다만 윤곽만 드러내고 밑으로 길게 깔린 초록의 카펫만이 그곳이 공간으로 둘러싸인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나머지는 모두 검게 칠해져 있어 밤을 방불케 하고 있는데 우측의 수직과 하단의 대각선으로 난 가느다란 선만이 그곳이 막혀 있는 듯한 상황임을 시사한다.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형」  1965년  

 

단순히 대상을 묘사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사실적이면서 대단히 암시적으로 감각의 이면을 들춰내고 싶었다. 모든 예술이 다 그런 게 아닌가?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이 그린 수많은 초상화들은 얼굴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뜨린다. 신체를 구성하는 살도 뼈로부터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을 통해서 감각이 실제 신체의 뼈와 살에 달라붙은 표면의 형상을 말하고자 했다. 고통에서 고함으로! 얼굴에서 머리로! 이것이 들뢰즈가 베이컨의 그림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감각의 논리이다.

 

 

 

 

 

 

 

 

 

 

 

 

 

 

 

 

들뢰즈는 신체는 형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형상은 구상이나 추상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 구상은 신체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며 추상은 신체의 흔적을 지워버린다. 대신 형상은 신체가 반응하는 감각을 그대로 표현한다. 고통의 감각은 고함에서 나오는 것이며, 얼굴의 감각은 머리와 고기라는 신체 표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베이컨의 입체적 회화는 경악에 가깝다. 육체와 영혼. 베이컨은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위해 기꺼이 그 가죽을 벗기는 연쇄살인마와 같다. 다만 그가 실제 살인마와 다른 것은 그는 예술을 통해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상관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고깃덩어리는 그의 예술적 질료였다.

 

부풀리고 뒤틀린 인간은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상처 입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반면 야수 같은 모습은 인간이 지닌 동물적 파괴성을 드러낸다. 베이컨의 그림은 또한 생명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면서도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의 이율배반적 속성을 폭로한다. 베이컨은 우리 내면에 깊숙이 숨겨진 육체와 정신의 부끄러운 본질을 빠끔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 형태의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심연 깊숙이 파고들어 우리의 미적 쾌감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우리 주변에는 이미 그것의 원초적 적대감을 듬뿍 담고 있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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