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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2 - 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 ㅣ 몸젠의 로마사 2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4년 2월
평점 :
Scene #1 로마가 아직도 회자되는 이유는?
로마제국은 세계역사 중에서 가장 강하고 오랫동안 존속했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탄생해 기원 후 476년 서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약 120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존속했다. 동로마제국이 유지됐던 시기까지 포함하면 약 2200년 이상을 대제국으로 존재한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 때문인지 서구인들에게 로마의 역사는 그다지 호의적으로 비춰지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은 로마의 쇠망을 조금 더 늦췄을 뿐”이라고 폄하한 토인비를 비롯해 많은 서구 역사가들은 “공화정시대는 존경하지만 제국이 되자마자 로마의 타락이 시작됐다”는 식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로마처럼 당대 최강의 국력을 지니고서도 장기간 존속한 조직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로마’는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로마 시내를 뒤덮고 있는 웅장한 건축물들이 가지는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열등한 민족인 로마인이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커다란 문명권을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 바로 로마의 ‘생존과 성공 DNA’를 찾는 과정일 것이다.
이탈리아 로마의 테베라 강 유역에서 시작된 작은 공동체가 지중해는 물론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정확한 현실 인식과 그에 따른 적절한 대응, 즉 유연함이었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국가나 조직은 물론 개인 안에서도 갈등은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 갈등의 원인을 정확히 인식하고, 변화를 능동적으로 반영하는 체제를 준비하는 유연함, 그리고 그러한 유연함이 지배하는 문화의 필요성이 바로 로마가 공화정으로 전환하는 역사적 과정을 살펴야 하는 이유다.
Scene #2 견제와 균형 시스템으로 발전
로마제국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시스템의 힘에 의해 성장했고 발전을 거듭했다는 점이다. 로마는 역사적으로 절대 권력을 지닌 한 사람에 의해 지배된 ‘전제군주 시대’도 경험했지만 많은 지도층과 시민에 의해 국가가 운영됐을 때 조직력은 더욱 충만했다. 장군 한 사람보다 수많은 시민군이, 군주 한 사람보다는 수많은 집정관들이 로마 힘의 원천이었다.
왕정, 귀족정, 민주정 원리가 혼합된 정치체제가 성공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왕정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통해 국가 기초를 만들어 나갔으며, 성장기에는 귀족과 평민이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 속에서 조화를 유지하면서 국가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1인 지배에 의해 정치적 균형이 무너지고 국가가 개인에 의존하게 되면서 로마는 발전의 에너지를 잃어갔다.
로마 정치체제는 집정관에 초점을 맞추면 왕정처럼 보이고 원로원 기능에만 주목하면 귀족정처럼 보인다. 또 민회를 중시하는 사람은 민주정이라고 평가한다. 수많은 집정관이 해마다 바뀌었는데도 계속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가 어느 한 부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체가 시스템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이 말해주고 있다.
공화정 시기 집정관은 왕을 대신했는데 민회에서 선출돼 원로원 승인을 얻어 취임했다. 그 절차는 왕과 마찬가지였지만 종신제였던 왕에 비해 임기가 1년밖에 안됐다. 다만 재선은 허용됐고 연령은 40세 이상으로 제한됐다. 게다가 정원이 두 명이었고 동료 집정관 생각이나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집정관이 동의하지 않는 한 정책은 집행되지 않을 정도로 견제와 균형 원리에 충실했다.
로마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도가 호민관이다. 로마는 공화정 초기인 BC 494년 이 제도를 도입했다. 호민관은 평민으로 이뤄진 민회에서 선출했으며 민회 의장으로 민회를 소집하고 주재했다. 호민관은 민회에서 독점적으로 법률을 발의할 수 있는 권리와 때에 따라 원로원을 소집하고 청원할 권리가 있었다. 또 집정관 및 정무관의 결정이나 다른 동료 호민관의 결정이 평민의 권익에 배치될 때에는 거부권을 행사해 무효화하거나 중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호민관의 중요한 역할은 평민의 요구를 대변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었다. 집정관이나 정무관의 전횡을 막아달라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든 평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평민이 언제든 찾아와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호민관은 밤낮 자기 집 문을 열어 놓아야 했고 도시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했다. 호민관은 위협을 받지 않고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그의 신체는 신성불가침으로 선포됐다.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의무 수행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로마는 호민관을 매년 선출해 평민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계급 간 갈등을 봉합할 수 있었다. 로마가 국가 운영의 묘를 살리면서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호민관이 평민과 귀족의 완충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Scene #3 서두르지도 멈추지도 않으며 꾸준히 로마는 이루었다
우리는 흔히 “로마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경구를 자주 인용하곤 한다. 천년이 넘는 역사에서 로마는 계속 성공만 해왔을까.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쪽이다.
로마도 인간이 만든 제국인 이상 실패가 없을 수 없다. 오히려 성공보다는 실패와 좌절의 역사가 길었다. 하지만 그들이 짧게 성공했다 멸망한 동시대 다른 민족이나 국가와 다른 점은, 스스로의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주저 없이 개혁을 단행하는 용기를 잃지 않았던 데 있다.
로마가 천년 이상 존속한 이유는 결코 운이 좋아서도 아니고 그들의 자질이 특별히 우수해서도 아니다. 다만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한걸음 한걸음 개선해왔기에 번영을 오래 지속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제’ 미덕을 로마의 역사에서 찾고 있다. 초기 로마의 왕과 귀족들은 평민보다 앞서 솔선수범과 절제된 행동으로 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그러나 로마의 모든 사회지도층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보수와 진보가 벽을 쌓고 살듯이 초기 로마도 귀족과 평민의 갈등이 심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권력에 눈이 먼 일부 혈통귀족들은 평민의 생활에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신경 썼을 뿐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이 제정됨으로서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완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당시 귀족과 평민의 갈등은 로마 사회의 일치를 해치는 주범이었다. 리키니우스법에 따라 평민도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어 모든 국가 요직도 평민에게 개방됐다. 귀족. 평민 간 결혼도 합법화했다.
개혁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개혁은 반드시 기득권자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사람이 찬성하는 개혁이란 어느 시대에도 존재하기 어렵다. 진정한 의미의 개혁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역사상 수많은 민족이나 국가, 집단이 등장했지만 그러한 노력을 꺼려 쇠퇴해갔고 그 노력을 아끼지 않은 소수만이 미래를 개척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인들은 구조조정의 달인들이었다. 어떤 정치시스템이나 조직시스템이든 처음부터 국민이나 조직 구성원을 불행에 빠뜨리려고 생각하면서 만들어진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기가 ‘선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거나 시행되는 과정에서 ‘악한 것’으로 바뀔 수 있다. 만든 자의 의지대로만 되는 세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인은 시스템 자체에 있다기보다 외부 환경의 변화에 있다. 왕정, 귀족정, 민주정, 독재정으로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변화한 그리스와 비교하면 오랜 기간 동안 왕정, 공화정, 제정으로 바뀐 로마의 정체(政體) 변화는 둔한 소처럼 답답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테오도르 몸젠은 로마 정체의 변화를 ‘로마 혁명의 보수성’이라는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한번 개혁의지를 다지면 흔들림 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기원전 4세기 7개월간 켈트족의 침략을 받아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로마가 이를 극복해간 과정이 좋은 예다. 20년 만에 로마의 복구가 어느 정도 끝났지만, 조금만 회복되면 반성의 자세를 금방 잊는 다른 민족과 달리 로마인들은 로마 부흥-방위체제 확립-내정 개혁 이라는 개혁 프로세스를 단호하게 밀고 나갔다.
Festina lente(서두르지도 멈추지도 않으며 다만 꾸준히). 로마는 그렇게 내부 갈등을 극복하고 변화를 이루었다. 로마와 같은 노력과 시간과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본받을 점은 본받되 로마를 모방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융화와 접점이지만,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서두르지도 멈추지도 않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