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림이 되다 -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 현대미술가 시리즈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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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정직하게 그린 여왕의 얼굴

 

피카소는 인물화(portrait)는 ‘주관적 기록’이라고 했다. 대상의 묘사가 아니라, 작가의 눈과 마음으로 느낀 가변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초상화, 인물화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서서히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 잡았는데, 통치자나 종교적 지도자들을 그리던 관습은 점차 폭을 넓혀갔고, 사진이 발명된 19세기부터는 가히 폭발적으로 확대된다.

 

명함판 사진이 유행하면서 사회적으로 알려진 명사의 사진은 하루에 몇 천 장씩 팔려나가는 일종의 품귀현상도 빚었다. 인물의 이미지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욕구는 사진의 대중화와 맞물렸고, 좋아하는 사람,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습은 복잡한 감정의 문제와 함께 부흥했다.

 

이렇게 사진이 인물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대체하면서 회화에서 인물화는 그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운 듯 보였지만, 1970년대 이후 다시 인물화의 변화가 눈에 띈다. 그 중에 주로 인물 초상화를 그린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가 루시안 프로이드(1922~2011)이다. 낯선 이름일 수 있겠지만, ‘프로이드’라는 성(姓)을 보는 순간 유명한 정신분석학자가 먼저 생각날 것이다. 그렇다. 루시안 프로이드는 당신이 생각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 정신분석학자의 이름을 ‘프로이트’라는 영문 표기법을 많이 사용한다. 간혹 ‘프로이드’라고 표기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책의 제목을 고려해서 ‘프로이드’로 통일해서 쓰겠다)

 

 

 

 

루시안 프로이드  「엘리자베스 2세」 2001년

 

 

그래도 이 사람이 ‘듣보잡’(듣도 보지 못한 잡놈) 화가라고 생각하는가. 프로이드는 영국의 최고 화가답게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그리기도 했다. 그가 그린 영국 여왕의 초상화로 영국 언론과 문화계가 떠들썩할 정도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001년에 제작된 영국 여왕의 초상화는 자신의 특유한 자연주의 기법으로 그린 가로 15.2㎝, 세로 23.5㎝의 작은 유화이다. 초상화에 나타난 여왕은 단호하며 웃음기가 없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당시 이 그림을 평한 더 타임스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려진 영국 여왕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아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언론은 프로이드의 영국 여왕 초상화를 가장 훌륭한 왕실 초상화라고 찬사도 나오는 반면, 대중지 선(Sun)은 여왕의 품위를 손상시킨 프로이드를 런던타워에 투옥해야 한다고 혹평했다.

 

여왕 얼굴을 너무 '정직하게' 그렸던 탓일까. 사실 프로이드가 바라본 여왕 얼굴은 아름답고 기품 있는 표정이 아니다. 깊게 파인 주름에 고집 센 중년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프로이드는 너무나도 솔직하게 그림을 그렸다. 여왕을 미화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신비의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여왕의 실제 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러니 여왕을 신격화하는데 익숙해졌던 사람들 입에서 여왕 모독죄라는 혹평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유명세를 타는 사람들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더 신경을 쓴다. 예를 들어 황제의 얼굴에는 권위와 권력을 곳곳에 투영시켜야 했다. 때문에 늙지도 않고 인간적인 고뇌도 느껴지지 않는, 신 같은 인간으로 그려지는 것이 관례였다. 어디 황제의 얼굴뿐이겠는가. 모델 입장에서는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멋지게 그려주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Scene #2  화가와 모델, 서로 그림이 되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기쁘게 느꼈던 특별한 경험이 언제일까? 오랜 시간 끝에 그림 한 점이 완성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희열감 아니면 모델이 자신의 초상화에 흡족해서 화가에게 수고비를 줄 때?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다만 아무래도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에 어울리는 모델을 발견하고, 그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과정이 아닐까?

 

화가의 사랑하는 연인이나 친구, 가족은 화가의 마음을 잘 알기에 선뜻 모델이 되어주기도 하며 그의 작품 세계를 가까이 이해하기도 한다. 그림이 너무 독창적이어서 제 아무리 친한 친구나 가족이라도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화가는 이들을 끊임없이 설득할 수 있으며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몸소 증명한다. 화가의 이력과 내면을 알지 못하는 외부인일수록 그 화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편견을 가지기 쉽다.

 

그래서 특별히 자신의 감정을 잘 들여다보는 이들을 만나 기쁨을 맛본다면 창작열이 솟구칠 것이다. 화가와 모델의 혼연일체, 일심동체. 그런 모델과는 당연히 오랫동안 함께 작업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세월 속에 우러난 장맛처럼 모델의 겉모습과 작가의 내면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화가와 모델의 혼연일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프로이드와 미술평론가 마틴 게이퍼드일 것이다. 게이퍼드는 프로이드에 관한 책을 쓰고 준비하는 동안 스스로 화가의 모델을 자처한다. 화가 앞에서 미술 평론가가 아닌 모델이 되어 초상화가 제작되는 것. 참으로 흥미로운 제작 과정이다.

 

미술사에 보면 유명 화가들이 남긴 초상화 중에는 종종 평론가를 모델로 삼아 그린 것이 있다. 이런 그림들은 화가와 평론가 사이에 친분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미술 평론가라는 직업은 화가에게는 야누스의 얼굴이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해해주고 찬사를 보내는 친구가 되기도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의 심미안에 맞지 않으면 혹평으로 돌변하기도 하는 존재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옹호한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가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세잔에게만 악의적으로 혹평을 하자 서로 관계를 단절한 예술사의 에피소드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루시안 프로이드  「파란색 스카프를 맨 남자」 2003~2004년

 

 

인지도 높은 이 미술 평론가가 프로이드의 그림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 이상, 절대로 프로이드을 소개하는 책을 집필할 수 없었으며 직접 그의 모델이 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이퍼드는 2003년 11월 28일부터 2004년 7월 4일까지 런던에 있는 노화가의 작업실에서 모델로서 30회 정도 만났다. 그 만남의 과정 중에 프로이드가 게이퍼드를 모델로 한 초상화가 바로 「파란색 스카프를 맨 남자」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이 그림 한 점을 완성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7개월 정도. 미술에 무지하고 모델비를 챙기는 것이 목적인 모델이라면 이 7개월의 제작 과정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게이퍼드에게 이 7개월이라는 시간은 소중하고 흥미로웠다. 그가 만난 당시 프로이드의 나이는 82세. 대화 내용은 물론이고 자연스럽게 프로이드의 생애와 예술론, 시대정신, 지인들과의 관계, 작업에 임하는 자세와 소소한 습관 등을 더욱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노화가에 대한 단순한 전기 수준을 넘어 그의 은밀한 심리적 생태적 상태와 지적 면모까지 생생한 육성과 행동을 통해 그려낸 한 편의 사실적 그림인 셈이다. 화가 프로이드가 모델 게이퍼드의 얼굴을 그리고 있을 때, 모델은 펜을 붓으로 삼아 자신을 바라보는 화가의 초상화를 한 권의 책으로 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Scene #3  인간에 대한 열정적 표현

 

컨템퍼러리 미술에 대한 일반인의 불만 중 하나는 작가들이 추하고 섬뜩할 정도로 혐오스러운 이미지들을 거침없이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미술을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불쾌감을 자극하고 꿈자리를 고약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루시안 프로이드  「잠자는 사회복지 감독관」 1995년

 

 

프로이드의 그림 또한 여전히 고귀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틴 게이퍼드의 책에 수록되지 않은 그림이지만) 뉴욕 경매에서 생존작가 최고가 경신을 기록했던 1995년 작 「잠자는 사회복지 감독관」을 보라. 살이 비곗덩어리처럼 부풀려져 숨쉬기도 힘들어 보이는 뚱뚱한 여인이 소파에서 누드로 잠자는 모습을 그렸다.

 

도저히 아름다움을 찾아보기 힘든 이 그림이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림의 경제적 가치를 먼저 따지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드가 이 뚱뚱한 사회복지 감독관, 그것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벌거벗은 그녀를 그린 의도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예술의 가치가 적어도 미(美)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더니즘 시기에 미와 조화가 미술의 중요한 추동력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프로이드는 이러한 편견을 공격하면서 추해 보이는 형상 속에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려 한다.

 

 

 

 

루시안 프로이드  「벗은 남자, 뒷모습」 1991~1992년

 

“모델 작업을 마친 뒤 나는 가능한 내 모델들의 느낌과 감정에 동감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작품이 내게서 나오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작품이 모델들에게서 비롯되기를 바랍니다.” (루시안 프로이드, 17쪽)

 

 

프로이드에게 아름다움이나 추함은 예술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와 추라는 외적 허상들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실재)을 얼마나 깊이, 밀도 있게 파고드느냐 하는 점이다. 그 실재는 기존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미세하고 오묘한 세계다. 프로이드의 인물화는 메모리칩처럼 진실의 미세한 정보들이 얼마만큼 압축돼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루시안 프로이드  「쉬고 있는 화가의 어머니 I」 1976년

 

“몇 년 전 어머니를 그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는 과거 그 어느 때에도 그리고 그때 이후로도 그렇게 슬펐던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입은 원피스에 있는 페이즐리 무늬를 그리고 있었는데 내가 느끼는 슬픔이 페이즐리 형태에 투영될까봐 걱정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아마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루시안 프로이드, 72쪽)

 

그렇다고 모든 화가가 초상화 작업에 이렇게 긴 시간을 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프로이드는 초상화가 모델로부터 비롯되기를 원했다. 계산적인 구성을 밀어내고 ‘진실의 어색함’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진짜 ‘사람’을 그리는 것이다. 그의 바람은 고흐가 자살하기 한 달 전 여동생에게 쓴 편지와 통한다. “무엇보다 큰 열정을 품게 되는 대상. 초상화다. 한 세기 뒤 사람들에게 유령처럼 보일 초상화. 사진의 유사성이 아니라 인간의 열정적 표현에 의한.”

 

나는 드로잉과 채색만큼이나 대화가 모델 작업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초상화는 대상에 대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 이때 대상은 활성과 움직임이 없는 살아 있는 동상일 뿐만 아니라 각양각색의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 음직이고 말하고 반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중략) 그(모델)의 눈과 입, 얼굴 표정의 유동적인 지형학이 이미지를 밀랍 인형이 아닌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마틴 게이퍼드, 19쪽)

 

프로이드의 모델이 되는 동안 게이퍼드는 느꼈다. 노화가가 끝까지 인물화 제작을 고수하는 이유를. 프로이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린다. 사람의 마음, 감춰둔 이야기,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화폭에 담는다. 모델의 감정에 동감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훈련 덕분에 프로이드는 그것들을 하나의 ‘진실’로 끄집어내서 인물화로 구현한다. 그는 피카소처럼 주관적인 직관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인간의 초상과 누드 등을 대상으로 그들의 모습이 아닌 삶 자체를 인물화에 투영시키려고 한다. 화가와 모델 사이에서 오고가는 진솔하면서도 유쾌한 열정적 표현이 꾸밈없는 진실한 그림을 완성하도록 만든다.

 

만약 프로이드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게이퍼드의 초상화 연작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 프로이드가 사망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모델로서의 게이퍼드의 활동은 접게 된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시간이 지난 뒤에 유령처럼 보일 수 있는 초상화를 그리는데 성공했다.「파란색 스카프를 맨 남자」와 반쯤 그리다만 미완의 작품까지 프로이드의 작업실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인물화들은 화가, 아니 그림을 좋아하는 인간의 열정적 표현을 보여주는 위대한 족적이다. 프로이드는 자신의 마지막 예술의 불꽃을 되살려주는 일생의 모델을 만날 수 있었고, 게이퍼드는 그림에 스며든 화가의 열정, 치열한 직업의식을 글로서 영원토록 기억하게 만들었다. 아마 앞으로 프로이드-게이퍼드 조합 같은 멋진 관계에서 비롯되는 인간적인 예술을 만나가가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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