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Bowdlerism, Comstockery

 

 

 

 

 

 

 

1818년 영국 에든버러의 내과의사이면서 복음주의자인 토머스 바우들러는 자신의 '가족에게 큰소리로 읽어줄 수 없는' 모든 구절을 삭제한 『가족 셰익스피어』라는 제목의 개정판을 출판했다. 셰익스피어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해 당시의 '무절제한 기호'에 야합했다는 것이 그렇게 한 이유였다. 『햄릿』에서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아가씨, 당신 허벅지에 누워도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을 햄릿이 오필리어의 발치에 눕는 걸로 대체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바우들러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비종교적, 부도덕한 인상을 주는 구절을 삭제한 개정판을 낼 정도로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맞춰 불경스러운 표현을 고치는 데 앞장 섰다. ‘책의 내용 중 상스러운 부분을 무단 삭제 또는 정정’을 뜻하는 ‘바우들러리즘’(Bowdlerism)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오늘날에는 정치적 목적으로 상스러운 부분만이 아니라 그 어떤 부분이든 자신의 뜻에 맞게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것에도 쓰인다.

 

 

 

 

 

 

 

 

 

 

 

 

 

 

 

 

바우들러가 활동했던 영국 반대편 나라인 미국에서도 부도덕한 내용이나 장면을 검열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앤서니 컴스톡이다. 1870년대 반(反)음란 활동에 앞장섰고, 뉴욕퇴폐추방협회 회원들 중 가장 유명했던  뉴욕의 유곽들을 공격할 정도로 컴스톡의 활약은 악명 높았다. 그의 활약 덕분에 1873년 연방 음란 규제법 또는 속칭 ‘컴스톡 법’(Comstock law)이 통과되었다. 그 법의 통과 이후 컴스톡은 체신부 하청 업체 사장으로 변신하여 음란 우편물을 적발하는 일을 맡았다. 그 일을 하는 보상은 벌금에서 일정액을 받는 방식이었으므로, 적발을 많이 할수록 많은 돈을 벌게끔 되어 있었다. 물론 그는 종교적 열정을 갖고 열심히 달려들어 많은 적발을 했다.

 

컴스톡은 사회의 도덕성을 위협할 수 있는 책들을 금지하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놀랍게도 그가 금지 조치를 내렸던 작품이나 공연은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비도덕적’인 내용만 보이는 즉시, 음란물로 규정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워런 부인의 직업』에서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는 여주인공의 모습과 그녀의 어머니가 매춘업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출판과 공연 금지를 주장했다. 그가 생각하는 ‘비도덕적인 대상’은 섹스, 마약, 술 그리고 여성해방운동이었다.

 

그는 자신의 활동이 신에게 부여받은 임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 덕분에 컴스톡은 악명 높은 활동을 한 공로(?)로 그의 이름은 컴스톡 법뿐만 아니라 지나친 검열 활동을 비아냥거리는 단어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다.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검열"이라는 뜻으로 ‘컴스토커리’(Comstockery)라는 단어가 영어사전에 등록되었다.

 

 

 

 

Scene #2  예술이 ‘외설’로 바꾸는 건 간단하다

 

 

 

 

 

 

 

 

 

 

 

 

 

 

 

 

 

 

 

문학작품에서 성(性) 표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예술적 자유와 사회적 수용을 둘러싼 끊이지 않는 논쟁은 수없이 되풀이 돼왔다. 한때 외설 시비에 휘말렸던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나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남회귀선』 등은 그 후 외설이 아닌 고전의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국문학 외설 시비 1호로 꼽히는 염재만의 소설 『반노』역시 긴 법정 시비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아낸 경우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문화의 변천에 따라,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예술과 외설의 기준은 판이하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독자에게 성적 충동을 유발하는 포르노그래피와 성(性)을 아름답게 그린 에로티시즘, 이 양자의 차이가 한 작품을 예술과 외설로 구분 짓는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두 성질을 단정적으로 구분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특정 개인의 사고나 철학이 절대적 잣대가 될 수 없다고 보기에 더욱 그러하다.

 

 

 

 

 

 

 

 

 

 

마르키 드 사드의『소돔 120일』판매금지 처분 논란은 예술 작품에 대해 국가 기관이 검열하는 행위가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다. 예술과 외설을 나누는 ‘음란성’은 그 자체로 모호할 뿐만 아니라 사회 질서의 통제 수단으로 치환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간행물윤리위원회(간윤)가 이 책을 유해간행물로 지정하고 배포중지 및 수거 조처를 내린 이유는 ‘음란’하기 때문이다. 간윤은 “근친상간과 가학·피학적 성행위 등 표현수위가 지나치고 반인륜적 내용이 상당히 전개됐다는 판단에서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러나 출판사측의 반박 입장 표명 이후 재심의 끝에 겨우 청소년 유해매체물(책 표지에 ‘19세 미만 구독불가’ 문구를 표시함)로 유통될 수 있었다.

 

 

 

 

예술 작품을 음란성의 잣대로 바라볼 때 빠질 수 있는 함정 중 하나가 ‘상대성’이다. 일례가 최초의 누드화인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에 대한 평가다. 명화로 꼽히지만 한때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음란물’로 인식됐다. 당시 이 그림을 성냥갑에 넣어 판매했던 제조사는 음화 제조판매 혐의로 벌금 5만 원을 물어야 했다. 사드의 소설 역시 일본에서는 1948년 같은 이유로 재판에 부쳐졌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이 선정한 인문사상 추천 100선에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문제는 국가기관이 이 모호한 잣대로 예술 작품을 검열하는 시도가 사회 통제의 기제라는 점이다. 특히 사회 전반의 보수화 경향이 강해질 때 검열은 심해진다. 우리 사회가 성 문제에 대해 정상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면 굉장히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Scene #3  바우들러리즘, 컴스토커리 그 다음은 간유니즘

 

예술 작품과 외설물은 어떻게든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순수 예술을 가장한 외설물들이 너무도 범람하고 있다. 이를테면 독자의 성적 호기심이나 본능적 충동만을 자극하는 질 낮은 문학 상품 중에는 성을 팔고 사는 매춘 작품(?) 같은 것들도 섞여 있다. 독자 가운데는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도 얼마든지 있다. 이들에게 여과 없이 파고들어가 이들의 정서를 마구 해치는 무책임한 작가들에게는 일단의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하지만 문학작품을 천편일률적인 사법적 잣대로만 재단하는 난센스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융통성 없는 사회적 통념과 편견에 의해 유럽에서는 스페인 국립 만화대상 등 굴지의 만화 관련 시상식에 상을 받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청소년 유해 판정 결정 논란을 겪어야 했다. 출판사의 항의로 다시 한 달 만에 재심의 결과 청소년유해간행물 결정이 취소가 되었다.

 

만화 속에 폭력적인 장면은 차치하더라도, 선정적인 장면이 조금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작품의 초반부, 그리고 중후반부 즈음에 몇 컷 정도가 나올 뿐이다. 간윤은 이 장면들에 ‘음란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청소년 유해간행물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일 뿐, 얼마 안 나오는 장면을 문제 삼은 이유로 예술성 높은 만화작품이 한순간에 '음란물'외 될 뻔했다.

 

문학작품, 특히 소설 작품에서의 성적 묘사는 생명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행위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 보기 때문이다. 예술이나 문학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알려는 작업이라면 사랑이 충만한 성을 묘사했다면 예술이고, 사랑이 없는 성애를 통해 자극만을 충동질한다면 외설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음란물을 규정하는 간윤의 태도를 곱게만 볼 수 없는 것은 이처럼 야한 장면 몇 개로 유해성을 판단하는 자의적 기준 때문이다. 이야기 전체 맥락을 보지 않고, 부분만 문제 삼아 판단한다면 과연 공정하게 규정했다고 볼 수 있을까? ‘도덕’의 기준을 내세워 문제 되는 부분을 근거로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간윤의 사례는 이번만은 처음이 아니다. ‘간유니즘(Ganyunism, 간윤+ism)’이라는 이름으로 검열 사례를 뜻하는 단어가 사전에 등록되어도 어색하지 않다.

 

우리가 디지털 사회에 살고 있는 이상 국가 검열이 예전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가에서 유통을 금지시킨다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검열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도 바우들러와 컴스톡의 영혼이 우리 사회에 배회하고 있다. 정상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 한 권에 ‘음란물, 판매금지’ 딱지를 붙이는 순간,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작년에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해서 인기를 얻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롤리타』는 세상, 아니 우리나라에서는 쓰레기통으로 넣어야 하며 섹스 장면이 몇 개 나온 만화 『설국열차』에도 ‘19세 미만 구독 불가’ 판정을 내려야 한다.

 

간윤이여, 제발 제대로 된 검열을 하고 싶다면 책을 읽어라. 국민들 책 안 읽는다는 이유로 독서를 장려하는 문광부 장단에 맞추는 역할은 어울리지 않는다. 간윤의 역할은 독자가 읽기에 유익한 책을 선별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중하게 읽어보고 결정하란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고 천천히 유해물이 맞는지, 아닌지 결정해도 나쁘지 않다. 제발 내년에는 책 안 읽은 무식한 티 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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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3-12-1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번 공감합니다.^^.

cyrus 2013-12-12 12: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논거가 빈약한데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볼 수 있을 생각인데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