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게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에 수록된 ‘황혼의 반란’이라는 단편이 있다. 한 사회학자가 TV저녁 뉴스에 나와서 사회보장 재정적자의 대부분은 노인들 때문임을 증명해 보인다. 그러자 노인 배척운동에 정치인들이 가세해 의사들이 공익은 뒷전이고 고객을 잃지 않기 위해 노인의 생명을 마구잡이로 연장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사태가 갈수록 나빠지자 정부는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인공심장의 생산을 중단시켰다.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노인을 불사의 로봇을 만들 수 없다’며 ‘생명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는 존중되어야한다고 선언’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회학자의 주장은 젊은 사람들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을 배척하는 무시무시한 집단 심리로 형성하게 된다. 노인들은 노인수용소에 강제로 끌려가 그 곳에서 안락사의 운명을 맞는다. 그러자 할아버지 주인공 프레드는 노인수용소에 잡혀가기 직전 탈출해 반란을 주도한다. 체포된 프레드는 젊은 대원에게 이름 모를 주사를 맞으면서 마지막 말을 던진다. “너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게다!”라고. 소설 같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노인’은 우리가 기억하는 ‘웃어른으로 존경받던 할아버지, 할머니’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지난날 노인은 권위의 상징이며, 경험 지식의 제공자로써 필수적인 조언자였다. 경제적으로도 노인은 많지 않아, 우리에게 할당된 부양 몫은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이 시대, 나이는 더 이상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며, 경험 지식은 인터넷에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노인이 많아진 탓에, ‘그들의 부양이 국가적 부담’이 되어간다는데 문제가 있다. 책에서 언급한대로 “65세는 괜찮아요, 70세요? 손해의 시작이죠”처럼...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 그들 속에 포함될 것’이라는 사실.

 

 

 

 

 ♣ 그늘의 경계선

 

베르베르의 소설에 나오는 노인을 배척하는 집단 심리의 행위는 단순히 픽션만은 아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원시사회에서는 노인들을 잔학하게 대했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머리가 백발이 되면 죽였다. 남태평양제도의 어떤 부족은 노인이 되면 야자나무 위로 올려 보낸 뒤 밑에서 흔들어 떨어지지 않으면 더 살도록 하고 떨어지면 처형했다. 육체적인 힘이 세대사이의 관계를 규정했다. 그러나 문명이 조금 발전하면 노인들은 죽음을 당하지 않아도 혹독한 대우를 받는다.

 

 

 

 

 

 

 

 

 

 

몽테뉴의 『수상록』에는 다음과 같은 섬뜩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아들이 늙은 아버지의 머리채를 잡고 문밖으로 끌어내는 순간, 노인이 이렇게 외쳐댄다. “그만 둬 이놈아, 나는 내 아버지를 여기까지 끌어내지는 않았어.”

 

서구문명이 유입되기 전까지는 중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노인들이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정중하고 예의바른 대접을 받았다. 오랜 세월 변화가 없는 세계에서는 경험처럼 가치 있는 자산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세대 간의 관계도 급속도로 변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이나 배려는 시들어 가고 있다. 노인의 특권인 안정과 전통은 도외시되고 승리는 빠른 변화에 대처해가는 젊은이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노인의 경계선이 한창 일할 나이인 50대로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50에 이르면 자기 앞에 ‘그늘의 경계선'이 보이고 오싹하는 기분으로 그 경계선을 지나고 나면 젊음의 매혹적인 영역이 끝난 것으로 믿게 된다”는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의 ‘인생추분론'이 딱 들어맞는 말이 돼가고 있다.

 

 

 

 

 ♣ 지금의 20대가 노인이 된다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복지에 대한 수요와 노인층은 늘어나고 요구도 갈수록 커지는 형편이다. 반면에 세계 경제 위기가 장기화되면서 기업 투자가 위축돼 일자리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은 민심을 위한 공약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전환, 정년연장 등의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던 노인연금은 재정 및 복지부 내부 갈등 문제 등으로 인해 보류된 상태다. 이는 기업과 재정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법제화를 통하여 정치의 논리로 정치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다. 이것은 안 될 일이다. 지금의 비정규직을 생산한 것도 취업률을 높이기 위한 정치논리에서 비롯됐다. 그 결과 계속 근무할 수 있는 사람도 2년이면 재계약 없이 해임하는 폐단이 생겼다. 그리고 연금 지급을 통한 복지 문제는 재정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돈만 푼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지금 시행되는 노인 정책들이 포퓰리즘 일색으로 민심을 얻기 위한 단기정책이란 느낌이 앞선다. 물론 노인에게 필요한 것들이겠지만.

 

이미 고령사회에 접어든 국가들은 대부분 막대한 복지예산을 지출한다. 미래에 우리도 엄청난 복지예산이 필요로 할 것이며 결국 국민 세금으로 충당할 것이다. 노인문제도 소득에 따라 차별화해야 한다고 본다. 누구나 받을 수 있다면 ‘혜택’으로 여겨질 수 없다. 한정된 재원의 국민 세금인 까닭에,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노인들에게만 돌아가야 한다.

 

 

 

 

 

『맹자』(孟子)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존경할만한 사람을 가리키는 ‘달존(達尊)'이란 말이 나온다. 맹자는 그런 인물의 세 가지 조건으로 사회적 ‘명예'와 ‘나이', 그리고 ‘덕'을 꼽았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덕을 가장 중요시하여 나이에 알맞은 덕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존경을 받으며 ‘멋있게 늙어가는' 길은 현재 이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아득한 과거와 미래에 비추어 보면 현재란 하나의 점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시대, 같은 공간 속에서 나와 공존하는 주위의 모든 사람처럼 소중한 것도 없다.

 

미래에 노인이 되는 우리는 생각을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린 결코 지금 노인만큼 대접받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제도를 고쳐, 한평생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발상은 너무 유치하다. 지금의 20대가 백발의 노인이 되는 미래를 상상한다면 암울하다. 취업을 위해 스펙 쌓기에 열중하고, 경제적 자립이 없는 베이비부머를 봉양하느라 젊은 시절부터 고생했다고 우리는 청춘의 과거를 후손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후손들이 겪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외로움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위로와 용기의 말도 전한다. 그러면서 경제적인 혜택을 통한 예우와 대접을 받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황혼의 반란’은 일종의 유전병처럼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먼 훗날 젊은 세대가 ‘당신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어요?’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말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노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연장자로써 모범을 보이고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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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0-10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느새 '오십 고개'를 넘었는데 이래저래 '우리의 미래'가 참 여러모로 걱정이 되긴 합니다. 저같은 50대에 대해서나 cyrus 님 같은 20대에 대해서나 똑같이 말입니다. cyrus님의 이 글에 마침 등장하는《몽테뉴 수상록》이 너무 반가워서 그 책 속에서 읽었던 '오십 고개'에 대한 재미있는(?) 구절을 덧붙여 봅니다.

* * *

아아, 가련하게도
이제 오십 고개를 넘은 자를
두려워 마오. (호라티우스)

자연은 이 나이를 꼴사납게 만들 것 없이, 가련하게 만든 것만으로 만족했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이것이 일주일에 세 번쯤 허약한 힘으로 일어나며, 뱃속에 당연히 해낼 어떤 위대한 힘이나 가지고 있는 것처럼 거칠게 부스럭거리는 꼴이 보기도 싫다. 솜털에 불이 붙은 꼴이다. 그리고 지금 둔중하게 얼어붙어서 볼이 꺼진 이 나이에 이렇게도 생기 있게 팔딱거리는 자극이 놀랍다. 이런 욕망은 청춘의 꽃다운 시절에나 가질 일이다. 이런 충동을 믿고, 그대에게 있는, 이 피로할 줄 모르게 꾸준하고 충만하고 장엄한 열기를 한번 거들어 보라. 좋은 꼴을 보게 될 것이다.

cyrus 2013-10-10 21:26   좋아요 0 | URL
저는 동서문화사에 나온 수상록을 소장하고 있어요. 분량은 두껍고 완독하지는 못했지만 가끔 생각날 때마다 책장에 꽂혀있는 수상록을 읽곤 합니다. 흥미롭고 인상깊은 이야기나 멋진 명언을 만나면 밑줄이나 표시를 해둡니다. 그래서 밑줄 친 부분만 반복해서 읽곤 합니다. 옛날 시대의 글이지만 몽테뉴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이나 사람들의 감정이 지금과 별반 다를게 없는거 같습니다.

oren 2013-10-10 22:21   좋아요 0 | URL
"한 양서를 요약해서 만든 축소판은 모두 어리석은 축소판이다"라는 몽테뉴의 말이 아니더라도, '참다운 작품'은 가급적 완역본으로 읽을 필요가 있을 듯해요.

저는 이번에 '두 번째'로 완독하면서 예전에 20대 초반에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한 내용들을 몽테뉴의 글 속에서 길어올릴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그래서 독서노트에 옮겨 적거나 이런저런 생각들을 메모한 분량이 (지금 세어보니) 무려 112쪽이랍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많은 내용들을 자판을 두드려가며 필사하다시피 기록해 뒀답니다. 노트에는 '한 줄' 정도로 메모한 내용들까지도 가급적 여러 줄씩 풍성하게 옮겼으니 아마 두꺼운 노트 한 권으로는 다 담지 못하는 분량쯤을 옮겨 놓지 않았을까 싶네요. ㅎㅎ

cyrus님께서도 나중에 저처럼 '오십 고개'를 넘어서 다시 한번 몽테뉴 수상록을 읽으신다면 처음에 이 책을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한 내용들을 많이 발견하실 수 있으리라 믿어요.

cyrus 2013-10-11 21:38   좋아요 0 | URL
정말 대단하시네요. 한 권의 책에 대한 애정과 성찰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기록물이네요. 저도 oren님의 길을 따라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