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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과의 대화 - 세계 정상의 조직에서 코리안 스타일로 일한다는 것에 대하여 ㅣ 아시아의 거인들 2
톰 플레이트 지음, 이은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사계절의 사나이
리더란 무엇인가? 무거운 책임과 의무로 점철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구성원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상과 비전, 목표와 전략. 리더들에게 이러한 단어는 너무나도 친숙하다. 하지만 자신의 원칙과 상반되는 현실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16세기 초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권력에 저항하다 처형된 토머스 모어의 일생을 그린 영화 <사계절의 사나이>(Man for all seasons)를 통해서 리더라면 반드시 겪게 되는 ‘원칙과 현실의 조화’ 문제를 볼 수 있다. 모어는 가톨릭 신자로서 로마에 충성했다. 그는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했고 왕이 영국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에 반대했다. 모어는 결국 국왕의 노여움을 샀고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했다.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는 토머스 모어를 ‘사계절의 사나이’라고 불렀다. 그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모어의 숭고한 인격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모어는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 사상가로 칭송받지만 영화에서는 자신이 세운 원칙과 현실을 조화시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인물로 나온다.
♣ '아시아 인 유엔 총장'으로서 산다는 것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리더십을 보게 되면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토머스 모어가 오버랩 된다. 반 총장은 개인으로서의 삶보다는 공무가 우선이며 솔직하고 정직한 청렴한 공직자 이미지다. 그래서 정치적 견해를 유지하면서 개인적 소회를 밝히는 데 있어 매우 신중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민감한 질문에 요리조리 빠져나가길 잘한다고 해서 ‘기름장어’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그런 그가 입을 열었다. ‘아시아 정보통’으로 손꼽히는 전 LA타임스 논설실장 톰 플레이트와의 대담집 <반기문과의 대화>에서다.
반 총장과 저자 톰 플레이트는 2010년부터 2012년 사이, 두 시간씩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진행한 대담을 비롯해 사적으로 만나 나눈 여섯 차례의 대화를 나누었다. 반 총장에 관해 쓴 다른 책들이 그의 어린 시절부터 유엔 사무총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면, 이 책은 유엔 사무총장이 되고 난 후의 이야기를 본인의 입을 통해 전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지닌다.
임기 초반 반 총장이 마주친 현실의 벽은 뜻밖에도 내부에 있었다. 기존 유엔 직원들과의 조화가 어려웠던 것이다. 반 총장은 고위급 외교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면서도 겸손한 편이다. 그런 아시아 스타일을 서구 언론뿐만 아니라 사무국 직원들에게는 달갑지 않다.
그러나 반 총장은 말보다 성과가 우선이고 솔선수범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개인의 카리스마보다 집단의 리더십, 즉 모든 사람의 지지와 합의를 기반으로 조직을 움직이는 리더십이 우선이라는 신념을 지켰다. 아이티 대지진, 칠레 광산 붕괴, 파키스탄 홍수 등 세계 재난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국제사회의 구호를 요청하는 등 적극적인 현장형 리더십을 보였다.
이 책은 유엔이라는 조직과 사무총장이라는 직무의 한계도 보여준다. 유엔 사무총장은 오직 도덕적 힘과 권위, 그리고 회의 소집권만 있다. 모든 결정과 자원은 회원국에서 나온다. 분명한 한계 속에서 반 총장은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위해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 다른 국가 지도자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동시 휴전’ 선언을 이끌어내기 위해 분주할 때, 그는 ‘동시 휴전’의 프레임을 탈피해 이스라엘의 ‘일방적’ 휴전을 성사시켰다.
♣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더 강하게 만든다
“많은 이들이 제게 유엔 사무총장은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직업이라고 충고했습니다. 해보니까 알겠습니다. 이 일이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요. 농담 삼아 회원국이나 친구들에게 말하곤 합니다. 제 임무는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가능한 임무로 만드는 것이라고요. 이게 제가 하는 일입니다. 제정신이든 아니든.” (47쪽)
유엔 사무총장의 임무는 공직에 대한 사명감 없으면 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일이다. 사시사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끊이지 않은 ‘정글’의 세계를 국제 평화와 안전이 유지되는 ‘정원’으로 만드는 중대하면서도 불가능한 역할을 반 총장이 6년째 맡고 있다.
다시 영화 <사계절의 사나이>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처형 직전 토머스 모어는 마지막으로 사형집행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의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정직한 원칙을 지키려고 했다. 반 총장도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직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더 강하게 만든다.’ 톰 플레이트는 철학자 니체의 격언을 언급하면서 차분하면서 강직한 성품의 반 총장을 평가했다. 내․외부에서 비롯된 현실의 벽을 두려워하지 않고 꿋꿋하게 맞서 극복한 그의 끈기는 유엔총회 193개국 만장일치로 연임에 성공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야말로 반 총장은 서구 언론의 집중포화와 유엔 조직 및 직원들과의 갈등과 반발 속에서도 공직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세계 정상의 조직을 이끌어나가는 ‘세계절의 사나이’다. (세계절: ‘세계’와 ‘사계절’을 합친 조어)
열네 시간동안 이루어진 대화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낸 반 총장의 모습은 리더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알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시련을 극복하고 실패를 이기는 힘은 결국 자기 자신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스스로를 이해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바로 안다는 것은 리더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저 최고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리더란, 리더라는 자리에 부합하는 실력과 윤리적 원칙, 위기관리 능력 등을 갖춘 관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