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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1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ㅣ 몸젠의 로마사 1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3월
평점 :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역사책, 몸젠의 로마사
로마제국의 역사를 다룬 책은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로마 시대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로마의 탄생과 멸망을 시오노 나나미식의 대작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핵심적인 내용만 추린 한 권으로도 끝낼 수 있다. 또 아무데나 손 가는 대로 펼쳐 로마 시대의 미시사를 가볍게 읽는 책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진정한 로마사 고전을 읽지 않은 채 로마 역사에 능통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권 참고 문헌 목록을 본 적이 있는가.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할 때 사용한 2차 사료 중 하나가 테오도르 몸젠(1817~1903)의
로마는 영웅 전설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책은 로마 역사를 '신화'로 바라보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고대 로마인의 삶과 로마의 흥망성쇠를 실증적으로 연구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서 저자는 로마의 역사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역사를 다룬다고 말한다. 이탈리아 반도에 살던 전체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민족과 언어의 원류를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권은 로마 건국의 신화 로물루스와 레무스 이야기로 독자를 로마의 세계로 초대한다. 하지만 몸젠의 책은 다르다. 이탈리아 초기 민족이 반도에 정착되는 사실부터 시작한다.
로마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2천 70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역사가 한 곳에 압축돼 있다. 로마를 본다는 것은 그 안에 응축된 역사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국 설화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을 중심지로 정하고 암소와 황소에 쟁기를 달고 사각형의 경계선을 그어 로마가 탄생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몸젠이 수집한 연구 성과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기원전 753년 이전에도 고대 이탈리아 민족은 조직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민족은 크게 라티움 지방 종족과 움브리아 종족으로 나뉘는데 초기에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이탈루스 왕에 의해서 농경 생활로 전환하게 된다. 이탈루스 왕은 이탈리아 초기 법 제정에도 깊이 관여할 정도로 이탈리아 역사의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몸젠의 실증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진정한 로마 건국의 시초는 이탈루스인 것이다.
2천 년 묵은 민족적 통일의 씨앗
이탈리아의 역사는 로마 제국 분열 이후 동, 서로마로 분열되다가 중세에 들어서 밀라노, 베네치아, 나폴리 같은 도시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도시국가의 전성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탈리아는 작은 왕국들을 통틀어 부르는 하나의 집합체 이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민족주의 부흥에 힘입어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간추린 이탈리아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이탈리아인들이 ‘민족’으로서의 동질성 인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굵직굵직한 역사의 근간만으로 역사 속 민족의 특징을 규정하면 곤란하다. 이탈리아가 분열과 갈등을 거듭하는 '콩가루' 나라가 아니다.
민족적 동질성을 정치 영역보다는 놀이와 예술에서만 드러내는 희랍인과 다르게 이탈리아 인은 이미 자기통제에 기초한 민족의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라티움 평야에 있는 작은 부락들은 독립된 주권을 가질 정도로 통치자가 다스리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그러면서도 ‘연맹체’라는 공동체 의식은 남아 있었다. 몸젠은 씨족 부락의 라티움 연맹 공동체의 등장에 대해 지역 분리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으며 민족적 유대감을 고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민족적 통일의 꽃은 가리발디가 활동하던 19세기에 늦게 피었을 뿐 종자는 이미 고대에 형성되었고 발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2천 년 묵은 연꽃 종자가 조그만 새싹을 틔우듯이 그렇게 ‘로마 민족’은 탄생했다.
실증주의 역사의 대부(代父)
몸젠의 역사 서술 방식은 역사적 증거물을 제시해서 실증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그의 역사에는 ‘가정(假定)’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나긴 세월의 풍파에 파묻혀 역사가의 기억 속에 사라질 뻔한 역사적 문헌을 분석하는데도 몸젠은 주관적인 해석을 지양한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쿠르베는 “나는 보이지 않는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실제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사실주의적 회회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이다. 몸젠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며 증명 불가능한 신화를 역사로 서술하지 않았다. 그는 신화를 ‘스스로 역사이기를 희망하지만 훌륭할 것 없는 단순한 설명’이라고 정의한다. 자신 즉, 역사가가 사료를 충분히 검토해서 설명될 수 있는 내용을 진짜 ‘역사’라고 인식했다. 몸젠의 로마사는 실증주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시대에 쓴 책이다. 간혹 전체적인 틀을 보는 거시사적 관점을 옹호하고 개인의 행위, 사유, 문학 등을 역사의 대상으로 제외해야 한다는 역사관을 드러나는 내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역사관은 사망할 때까지 인생의 절반을 로마사 개정에 몸 바친 탐구 정신을 생각해서 애교로 봐주자.(몸젠이 최종적으로 개정 증보한 로마사는 그가 죽은 후 1904년에 출판되었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소설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세우는 일본인이 쓴 로마사와 비교하면 몸젠의 로마사는 인문학적 가치가 훨씬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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