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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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계속 싸우는 이유는 국가가 조장하는 빈곤과 오랜 독재와 군국주의가 가져온

인간 파멸에 끝없이 희생되는 것에 지쳤기 때문이다. (프란츠 파농, p 531)

 

 

 

 

 

  제3세계 국가들은 지금까지도 못 사는걸까?

 

내가 다니는 학교 행정학과 3학년 전공수업 중에 ‘발전행정론’이라는 과목이 있다. 이번 2학기에 개설되어 있는 과목으로 수학하고 있다. 발전행정론은 발전도상국의 국가발전을 위한 전략과, 국가발전 추진 체제로서의 행정 체제의 발전 문제를 연구하는 행정학의 한 분야이다. 발전도상국의 발전 전략을 거시적으로 다루는 과목이라 오늘날 행정학과 과목 중에 구식에 속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에 크게 유행하다가 1970년대에 사라진 반짝 이론인 것이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신청한 전공수업 중에서 제일 관심 있게 공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도 발전도상국들의 빈곤은 4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니까. 과거에 ‘제3세계’라고 불리던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은 선진국들에 비해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사실 과목 내용 자체만 흥미로워서 공부하는 건 아니다. 발전행정론 수업이 토론방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이 과목을 안 좋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토론 방식은 한 주마다 교과서 한 챕터를 주제로 삼아 학생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것이다. 토론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찬반 의견을 나누어 서로 팽팽하게 맞서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준비한 의견들을 서로 교환, 비교해나가면서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몇 주 전에 했던 토론 주제는 ‘제3세계 국가의 저발전 원인과 대책’이었다.

 

25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각자 제3세계 국가의 저발전 원인에 대해서 의견을 말했는데, 다양한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학생은 기후가 열악해서 원조를 받아도 발전할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생은 일부 제3세계 국가에서는 여전히 선진국의 경제 원조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제3세계가 발전하지 못하는 원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했다.

 

학생들의 토론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학자들 사이에서도 저발전의 원인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1960년대에 잠시 유행했던 발전행정론 역시 개발도상국으로 부상한 제3세계의 저발전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문 분야이다. 발전행정론의 유행이 시들어지면 또 다른 학자들은 저발전의 원인을 분석한 이론들을 가지고 나온다. 이처럼 시대가 바뀔수록 이들 국가의 저발전 원인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한 답을 내놓으려고 하고 있지만,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 경제제도의 방향이 국가 발전을 좌우한다 

 

 

 

 

 

착취적 경제제도(북한)과 포용적 경제제도(남한)가 만들어 낸 빈곤과 발전의 결과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공동으로 저술한 경제학자 대런 애시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이 우리 발전행정론 토론을 듣고 있었다면 아마도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학생들이 주장한 기후 원인론, 원조 부족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주장하는 세계 저발전의 원인은 간명하다. 지구촌 빈부 격차는 지리나 문화 탓이 아니다. 정치, 경제 제도가 얼마나 포용적(inclusive)이냐, 착취(extractive)하느냐가 결정적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남북한의 차이를 비교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북한이 이처럼 경제적으로 다른 길을 걸은 연원은 분명하다. 남한에서는 경제적 삶을 지배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규칙인 경제제도가 국민의 저축과 투자, 혁신을 보상해준 반면, 북한은 그렇지 못했다. 양측 모두 중앙집권화의 역사를 통해 성장이 가능했지만, 원래 그런 권력이란 좋게도 쓰이지만 나쁘게도 쓰이는 법이다. 남한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수출과 혁신을 장려하고 공공재를 제공했지만, 북한은 탄압과 통제를 위한 권력을 휘둘렀을 뿐이다" (p 15)

 

 

남북한이 보여주는 차이에는 전 세계 부국과 빈국의 차이를 통해 일반 이론의 모든 요소를 설명할 수 있다. 저발전의 원인은 바로 '제도'에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포용적인 제도'는 발전 성공으로 이끌며 모두를 끌어안고 잘살게 만든다. 반면 지배계층만을 위한 수탈적이고 '착취적인 제도'는 정체와 빈곤을 가져온다. 사유재산이 보장되고 법체제가 공평무사하게 시행되고, 누구나 교환 및 계약이 가능한 경쟁 환경을 보장하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는 포용적인 제도가 발달되어 있다.

 

착취적인 제도에 의한 국가의 경제는 곧 패망으로 가는 길이며 저발전이라는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착쥐적인 제도에 의한 국가 실패를 지도자의 무지 탓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무조건 옳은 말은 아니다. 소수 엘리트가 수탈적 제도를 선택하는 건 경제발전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포용적 제도가 불러올 창조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창조적 파괴가 불러올 결과는 부와 소득분배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 권력도 분산시키며 다원화된 사회로 변모된다. 이렇게 되면 수탈적 체제의 지배층이 인민을 통제하기는 더 이상 어렵다. 이러한 착취적 제도에 의한 저발전 상태는 현재 북한의 김정은 체제뿐만 아니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고대 로마, 구 소련, 해방 이후 제3세계 국가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가난한 국가라고 여겨지고 있는 저발전 상태의 일부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도 군부, 관료 독재 체제에 의한 착취적 제도가 작동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예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진부한 이론 

 

책의 공동 저자는 경제 발전에 지리적 위치를 강조하는 제레드 다이아몬드, 문화적 차이를 중시하는 막스 베버, 선진국 경제학자들이 잘 가르쳐 주기만 하면 가난한 나라도 부자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책의 뒷표지 심지어 책 마지막 장까지 이 책에 대한 수많은 찬사들을 할애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이론을 비난한 제레드 다이아몬드까지도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예비 노벨경제학상이라 불리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받은 경제학자의 주장이라고해서 기존 학계를 뒤흔들 신선한 이론이 아닌 것을 감안하면 과찬이다. 사실 이 한 권의 책에 대한 수많은 찬사들은 몰이해를 넘어서 참을 수가 없이 요란스럽다. 

 

애쓰모글루의 주장은 '미시적 행위의 거시적 결과'라는 시각에서 설명한느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전제하고 있다. 즉, 착취적 제도를 만들어 내는 국가의 지배자, 개인의 행위에서 저발전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이미 1960년대 미국의 경제학자 맨커 올슨(1932~1998)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얼핏 고전적 엘리트 이론을 연상케 한다. 다음 책 본문에서 인용한 구절을 보자.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실수와 무지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라는 뜻이다. (p 109~110) 

 

 

19세기 말에 등장한 고전적 엘리트 이론은 사회는 권력을 가진 소수 엘리트와 가지지 못한 일반대중으로 구별되며, 소수의 동질적이고 폐쇄적인 정치지도자(엘리트)가 다수의 일반대중을 지배한다고 본다. 소수 엘리트 체제는 자율적이고 다른 계층에 책임을 지지 않으며, 사회전체나 일반대중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정책을 결정한다. 대표적인 고전적 엘리트 이론은 파레토의 법칙(20대 80 법칙)과 미헬스의 과두제 철칙 등이 있다. 그 중에 과두제 철칙은 애스모글루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다.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 체제는 민주적, 다원주의적 체제와 구분된다. 이렇듯 애스모글루는 고전적 엘리트 이론을 경제 체제와 접목해서 저발전의 원인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포용적인, 너무나 포용적인' 제도의 결과는 시장실패

 

저발전 원인을 딱 한 가지 관점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통해 저발전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일부 국가의 저발전 현상은 학자들의 명철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애스모글루는 저발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국가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은 착취적 제도를 포용적 제도로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제시했으나 저자가 간과하고 있는 허점이 몇 가지 있다.

 

사유재산이 보장된다는 것은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한다. 결국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경제제도와 비슷하다. 다만 포용적 제도와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신자유주의는 공정한 경쟁와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며 그로 인한 국가 내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포용적'과 거리가 먼 문제점을 낳고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경제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국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진 기업들은 자본을 독점화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 역시 '포용적 제도'의 취지랑 다르다. 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못하고, 소득 분배가 고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시장실패'로 이어지며 저발전의 원인이 된다 .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 정부 시절의 경제발전을 '포용적 제도'의 사례로 보기에는 어색한 점이 있다. 제3세계 국가에서는 경제사회의 원초적 자본축적의 결핍을 원인으로 경제발전을 주도하게 되고, 국가주도 산업화는 권위주의적 지도자의 출현을 조장하기 쉽다. 정치발전(민주주의)와 경제발전(자본주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지만 양자의 과제가 동시에 진행, 달성된다는 건 쉽지 않다. 국가의 지도자들은 산업화의 효율적인 추진과 발전위기의 극복을 명분으로 대부분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구사하며, 특히 민중부문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내세워 노동자들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배제시키는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통치제도는 민주적 정당성의 위기를 자초하여 민중저항을 유발하고, 이 와중에 경제적 측면의 효율성과 효과성마저 감퇴되면 저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박정희 정부의 경제발전은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특수적 사례인 셈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애스모글루는 한국 박정희 정부의 발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하는 게 아니라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취하고 있다.   

 

"한국의 사례처럼 착취적 정치제도에도 불구하고 경제제도가 포용적 성향을 띤 덕분에 성장이 가능하다 해도, 경제제도가 더 착취적으로 바뀌어 성장이 멈춰 버릴 위험이 상존한다."  (p 144)

 

 

 

부록을 제외한 본문만 해도 600여 페이지가 넘는 책에 한국의 사례가 소개되었다고 해서 그리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다.한국에 대한 평가는 여기저기 단편적으로 드러날 뿐이니까.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사회와 경제는 포용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나오는 권력 실세와 엘리트 관료의 부패는 아직 착취적 제도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증거다. 점점 부의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실자본주의의 폐해를 그대로 방치해둔다면 진정한 창조적 파괴를 물론, 고성장에 의한 국가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가장 성공적으로 고성장한 한국은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실패한 국가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정치와 경제 체제의 포용성을 높이기 위한 청사진이 나와야 한다. 창의와 혁신을 북돋울 포용적인 제도의 정착이 중요하지만, 냉혈한과 경쟁만이 남아 있는 이 척박한 한국 사회 지도에 '포용'을 그려 넣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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