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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Scene #1 고독한 석전경우(石田耕牛)
석전경우(石田耕牛)는 거친 돌밭을 묵묵히 갈아매는 소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는 뜻을 지닌 사자성어다. 양손에 물뿌리개를 든 채 정원으로 향하는 노인의 뒷모습은 속도전의 사회 속에서도 우직한 걸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고집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앞뒤 물불 가리지 않는 혈기왕성한 ‘황소’였지만 세월의 장사 앞에서는 평온함과 여유를 찾는 ‘우공’(牛公)이 된다. 한편으로는 정원의 노인의 뒷모습은 플랑드르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에 등장하는 농부를 연상케 한다.
젊은 이카루스가 광활한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림 속 농부는 물에 빠져 살려 달라는 이카루스의 절규를 분명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 하고 있다. 그저 묵묵히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다. 세상은 개인의 운명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바깥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 만들어 낸 쓸쓸한 뒷모습이기도 하다.
Scene #2 포옹으로 사랑 확인하기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은 무척 다양하다. ‘사랑한다’는 말 자주 하기, 너무 식상하다. 그리고 말 한 마디만으로도 사랑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없다. 서로 눈 마주치기, 너무 모호한 감이 있다. 비언어적 소통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뽀뽀와 키스, 시작 단계의 애정을 확인하는 행위로써의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남녀 모두 공통적으로 ‘첫’ 키스와 뽀뽀에 대한 기억이 제일 강하다. 섹스는 사랑의 종착역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너무 타락했다. 그렇다면 남은 게 포옹하기(Hug). 포옹할 경우, 뇌에서 분비되는 '사랑의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옥시토신이 많이 나올수록 스트레스를 크게 낮춰주는 효과가 있다. 몇 년 전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을 했던 ‘프리 허그’(Free Hug) 운동이 우리 몸과 마음에 유익한 생리학적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스킨십은 의사소통을 하는 여러 가지 방식 중에서 가장 날것이며 직접적 방식이다. 그러나 삐뚤어진 ‘성’(性) 가치관에서 비롯된 흉흉한 범죄사고가 늘어나고 있는 요즘, 자유로운 포옹 행위가 어색해져만 가고 있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도 오래 살다보면 연인 시절 때 자주 하던 키스나 스킨십이 줄어들듯이 간단한 포옹하는 것마저도 잊어버린다. '촉감 궁핍의 시대’인 셈이다. 인간은 말랑말랑한 살갗이 바깥에 있는 인체 구조를 지녔기 때문에 외부 촉감을 잘 느낄 수 있다. 엉큼한 흑심을 품은 채 인간 몸 구조를 잘 활용하는 포옹도 좋겠지만, 마음과 마음의 포옹이라도 서로 간에 우선 건네는 것이 더 좋다. 사진 속 연인처럼 포옹을 자주 한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신체적 반응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간이 정지된 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있는 연인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Scene #3 따뜻한 모정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곳
아마도 아기를 어머니의 등에 업는 풍속이 있는 지역이 아시아권 국가뿐일 것이다. 유럽 풍속 중에 우리나라나 인도의 어머니처럼 아기를 등에 업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유럽의 경우, 아기를 요람 위에 재우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아기를 돌보는 풍속이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모정(母情)의 정도 차이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유럽보다는 아시아권 국가의 어머니들이 더 아기를 최대한 자신의 곁에 가까이 돌본다. 시장을 가더라도 어머니는 아기를 등에 업고 다닌다. 부엌에서 요리를 준비할 때도 그렇다. 박수근의 그림 속 어머니처럼 약간의 힘이 요구되는 노동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아기가 낮이나 밤에 잠드는 것을 제외하면 24시간의 반은 어머니의 등에 지낼 때가 많다. 어머니 당신 입장에서는 체력적으로 소모가 크지만 자신의 등 뒤에서 편안하게 잠이 든 아기의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워 보일 것이다. 아기가 어머니의 등에 업히는 행위는 단순히 아기를 좀 더 안전하게, 그리고 간편해서 돌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등에서 나온 따뜻한 모정의 체온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편안한 휴식처이며 아기만의 집이다.
Scene #4 바다(Mer)와 어머니(Mère) 그리고 자궁(Matrice)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품 안에 있는 아기는 자신들 앞에 펼쳐진 거대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어머니와 아기가 함께 하고 있을 때의 뒷모습은 어른이 되면서 잊혀져가는 모정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 가끔 우리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때 함께한 존재들을 먼 기억의 저 편으로부터 끄집어내기도 한다. 어머니가 된 아이는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의 존재를 그리워한다.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는 자궁 속에서 생활했을 때의 버릇이 남아 있다. 아기를 따뜻한 물에 목욕을 시키면 물에 대한 두려운 반응 없이 물장구를 친다. 자궁 속 양수를 받아들이는 신체적 반응에 의한 행동이다.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 나는 나는 넓은게 또 하나 있지 / 사람 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 같애”
‘어머니 은혜’의 노랫말처럼 정말 어머니의 존재는 넓고 넓은 바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하다. 어머니의 자궁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는 세상 밖으로 태어날 수 있었을까?
Scene #5 화려한 열정 뒤에 숨겨진 노력의 흔적
프랑스의 화가 에드가 드가가 남긴 수많은 그림들 중에는 유독 무희(무용수, 발레리나)들을 모델로 한 작품들이 꽤 많이 있다. 무희의 행동 하나하나 관찰을 했을 정도로 적지 않은 데생들도 남아 있으니 ‘무희의 화가’ 답다. 드가는 사람들의 무심한 한순간의 동작 따위를 포착하는 데 명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드가는 여성혐오주의자다. 무희들의 순간 동작과 예기치 않은 손과 발의 움직임에 눈먼 그가 삶에서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 또한 무희였다. 어떻게 보면 드가가 그린 무희들은 여성 혐오적 시선과 예술적 이상의 간극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드가의 사연은 그림을 보는 데 있어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드가의 섬세하고도 치밀한 관찰과 묘사는 마치 현장을 보는듯한 생생한 감동을 전해 준다. 드가의 무희 그림을 연상하게 만드는 사진 역시 그렇다. 우리는 역동적인 자세로 춤을 추는 우아한 모습의 무희만 생각한다. 그러나 토슈즈를 매만지는 동작에도 우아함과 섬세함이 느껴진다. 춤의 열정을 잠시 뒤로 한 채 복장을 점검하며 숨을 가다듬는 무희의 뒷모습에는 화려함 뒤에 숨겨진 피나는 노력의 흔적이 환하게 빛나고 있다.
뒷모습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또 다른 제2의 정면’이다. 다만 보이지 않아서 뒷모습의 진면목을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뒷모습을 통해 절실한 생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세월의 흔적 역시 정면에만 남는 건 아니다. 정면은 그저 드러난 앞면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진실을 숨기고 가리기 위해서 가면을 쓰기에 급급하다. 꾸미고 장식되고 포장된 앞모습보다 꾸밀 수 없고 속일 수 없는 뒷모습이 더 정직하다. 이제 정면만 관리하지 말고 소홀히 했던 뒷모습도 돌아볼 줄 아는 삶의 내공이 필요하다. 뒷모습 또한 우리의 얼굴이다. 앞뒤가 서로 다른 이중적인 존재가 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