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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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제 강점기 역사의 트라우마가 만들어 낸 '반일' 감정  

 

 

 

 

 

 

KBS 드라마 '각시탈'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일본을 응징하는 한국판 슈퍼히어로의 대활약을 그려낸 이야기다. 시청자들은 2대 각시탈 이강토(주원 분)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의 악랄한 만행을 제대로 다뤄주길 원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각시탈' 연출 관계자들은 드라마를 애청하는 시청자들 때문에 종종 곤혹을 치뤄야 할 때가 있다. 지난 7월에 모 포털 사이트에서는 ''각시탈' 속 기미가요 장면 논란'을 주제로 네티즌 투표가 실시된 적이 있었다. 7천명이 넘는 네티즌이 참여한 가운데 '연출을 위해 필요한 장면'이라는 대답이 70.6%로 나타났다. 반면 '한국 드라마에서 기미가요는 부적절한 장면'이라는 대답은 29.4%로 집계됐다. 이에 대해 '각시탈' 측 연출 관계자는 "기미가요는 극의 흐름상 꼭 필요했던 장면의 일부였을 뿐 중점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강토는 각시탈로 변신, 일본 형사들을 모조리 제압한다. 통쾌한 복수극에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모두 환호하고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각시탈' 항일정신이 부각되는 시점이면 온라인 반응은 뜨겁기만 하다. 하지만 일본인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될 때는 여지 없이 혹평이 쏟아진다.

 

어제 SNS를 중심으로 경기 고양시 지하철 3호선 화정역 광장의 모양이 일본의 '욱일승천기' 문양을 그대로 닯았다는 논란이 확산되었다. 욱일승천기는 일본 국기인 일장기의 붉은 태양 문양 주변에 붉은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형상화해 만든 것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상징으로 인식돼 있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간 외교 관계가 불화의 국면 상태로 접어들고 있는지라 국민들의 반일(反日)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고 있는 해프닝이다.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지 6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마음 속에는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드라마 속 기미가요 장면에 대한 시청자들의 예민한 반응 또한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기피감으로부터 비롯된 반일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 찬탈의 원인을 고종과 노론에서 찾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쇠락의 기운이 완연했던 대한제국의 모습 그리고 일제의 식민 통치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 그 당시 우리 민족에게 행했던 일제의 만행만큼이나 한국 근대사 역시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기를 꺼리는 역사이기도 하다.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기지만 고대와 중세보다도 더 멀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제 강점기 역사를 기피하고 자세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친일' 문제만큼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면모를 전혀 보이지 않는 일본정부의 몰염치를 끊임없이 비판, 감시하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역사적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관심이 선결조건이 되어야 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자신이 펴낸『근대를 말하다』에서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집권했던 일제 강점기 역사를 제대로 성찰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과거와 같은 똑같은 역사적 실수와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라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역사를 성찰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덕일 소장은 조선 망국의 뿌리를 1623년 인조반정 체제로까지 끌어올린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과 그 후예인 노론은 조선을 시대착오적인 사회로 끌고 갔다. 사지선다형이어야 할 외교는 숭명(崇明)이란 이념으로 통일되어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여러 사상 중 하나에 불과한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만들고, 해체되어야 할 신분제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500년 조선'은 단 30분 만에 이루어진 협상에 의해 멸망되었다.

 

노론 세력의 기득권 유지 속에서도 대한제국이 망국의 길을 걷을 수 있도록 더욱 재촉하게 만든 것은 고종의 리더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고종의 리더십을 둘러싸고 대한제국의 멸망을 이르게 한 무능한 군주인지 아니면 근대화를 앞장서 이끈 개혁을 시도한 군주인지 대해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2010년에 펴낸 『조선 왕을 말하다 2』에서도 이덕일 소장은 고종의 '개혁군주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그의 리더십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듯이 이 책에서도 망국의 결과를 초래한 고종의 오판에 대해 질타한다.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사진 왼쪽에서부터 두번째 인물, 1896년 아관파천)

 

 

 

고종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혜안이 없었다. 그리고 친일파만 득실거릴 뿐, 국제 정세에 해박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 주변에 없었다. 그게 대한제국으로서는 가장 뼈아픈 점이었다. 고종은 개화를 추진하다가도 입헌정치체제가 전제왕권을 조금이라도 저해하면 하루아침에 돌변해 관련 인물들을 제거했다.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척살했고, 아관파천(약 1년 동안 고종과 왕세자가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서 거처한 사건)으로 온건 개화파를 몰아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자는 일본이었다. 외형적으로는 러시아가 강했지만, 국민적인 단결이 이뤄진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됐을 때까지도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믿고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되돌려주는 것을 보고 러시아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승리한 후, 조선은 일본의 지배권에 놓이게 된다. 이때부터 고종의 이중적인 처신은 극에 달한다. 이미 세계가 대한제국을 일본의 몫으로 인정했음에도 고종은 줄타기 외교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러시아의 영향력은 완전히 소멸됐고, 급기야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조약 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고, 학부대신 이완용을 임시 외부대신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고종은 뒤로는 의병들에게 밀서를 내려 나라를 되찾자고 독려했다. 이 같은 이중적인 정치 행보는 조선이 망국의 길을 내달리는 동안 계속됐다.

 

 

 

 

 개나 고양이보다 못했던 조선인들의 삶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총독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은 일왕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조선인에게는 일방적으로 복종만을 강요하는 명령권자였다. 조선에서는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무단통치는 헌병경찰제도에 기반을 두었다. 헌병경찰제도는 군사경찰인 헌병이 보통경찰의 직무를 겸직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이것은 헌병으로 하여금 경찰권을 장악하게 한 것이다. 헌병경찰은 곧 총독의 수족이었다. 조선인을 완전무장해제시킨 다음 조선인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탄압하고 규제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에게 일정한 사법관의 특권을 부여하고 태형 제도를 제정, '범죄즉결례'를 공포했다.

 

이 때 무단통치의 시기의 조선인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했다. 불경한 언어와 거동, 일본인들에 대한 욕설 등을 이유로 조선인들은 일본 순사에게 강제로 연행되어 태형을 맞곤 했다. 태형 장면을 목격한 한 독립운동가의 증언을 보게 된다면 일본의 비인륜적 통치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벌려놓은 형틀과 그 형편(刑鞭, 채찍)은 조선 왕조가 자국민을 징치(懲治)하기 위하여 시행했던 고대의 태형과는 그 성격과 내용이 달랐다. 형판(刑板)에 사람이 엎드리면 음부가 닿는 곳에 구멍을 뚫었으며 두 팔을 십자판에 벌려놓고 두 다리와 허리를 묶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음경(牛陰莖, 소 음경으로 만든 매)은 끝에 납을 달아서 노출된 둔부를 치면 그 납이 살에 파고들어가 피가 흐르고 살이 찢긴다. 매는 1차 80대가 보통이며 중도에 기절하면 회생시켰다가 3일 후에 다시 때린다.

 

 

 

일본은 조선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서 조선의 산업자본을 키우고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제국의회에서 회사설치법안을 통과시키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토지매수에 힘을 기울였다. 비옥한 토지를 강제로 사들여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고 토지에서 생산되어 나온 곡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해나갔다. 일본의 토지 착취 이후로 조선의 자작농들은 가난한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본은 농업 경제만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 경제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인만 회사를 설립, 운영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기형적인 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민족자본 형성을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도 하에서 제정되었다. 조선인들에게만 부당하게 대우하는 일제 강점기의 법령들은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본의 속셈이 뻔히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당시 일본 관리들은 조선 회사령의 목적을 '조선 경제계의 발달에 기여하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식민 통치를 한국의 근대화 발전에 기여했다는 근거를 들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오늘날 일본 극우파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다.

 

 

 

 

 항일 정신이 살아 숨쉬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올해 3.1절을 맞아 전국 교교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정신대문제'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의하면 고등학생들의 86%가 '잘 모른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수의 학생들이 정신대문제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응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학생의 67.8%이 정신대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일본 정부에 대한 태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일본정부의 고의적인 무관심에 대해서도 98%가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한ㆍ일 과거사에 대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역사를 배우고 있는 청소년들이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민족 수난의 아픈 상처들만 기억되는 암울한 시기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도 바라볼 수도 있다.

 

지금 일제 강점기 과거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명확하면서도 한정적이다. 친일 청산 문제, 위안부, 독도.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결정적으로 국권을 온전히 일본에게 속절없이 넘겨져야만 했던 무기력한 국력 상태로 유지되어 온 일제 강점기 때부터 불거진 민감한 사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아픈 과거사인데도 역사를 배우고 있는 청소년들 심지어 학창 시절 역사를 배웠던 한국의 성인들마저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역사를 잘 모르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기억하기 싫은 우울한 역사라고 해서 그것을 외면하는 인식이다.

   

과거사를 교과서 공부하듯이, 오직 '친일 청산, 위안부, 독도' 프레임으로만 보는 단순하고 획일적인 역사적 시각과 인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항일무장투쟁은 을사늑약, 한일합방 이전 근대에서 발생했던 의병 활동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1920년대 초반이 절정기였다. 나라를 팔아먹은 왕족과 지배층은 일제에서 주는 합방공로작과 은사금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반면에 일가족을 이끌고 북풍이 휘몰아치는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회영과 이시형은 전 재산을 정리해 마련한 광복 자금을 갖고 6형제 일가족 60여명을 이끌고 망명길에 나섰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 국권을 상실한 이미 죽은 나라나 다름 없었지만 여전히 항일 정신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이렇듯 나라의 패망 시기에 엇갈린 판단으로 자신의 길을 찾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과 활동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매해 광복절 즈음에는 일본 군경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한 생존 유공자들이 쓸쓸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이들은 정부에서 주는 적은 생계비에 의지해서 고령과 병마와 싸우며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운 항일·독립유공자들이 국가로부터 정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자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항일'(抗日)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움'이라는 뜻이다. '반일'(反日)은 '일본에 반대함 또는 일본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실 '항일'과 '반일'의 사전적 의미만 본다고해서 양자의 의미가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어지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항일'과 '반일'의 개념은 서로 비슷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과거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을 반대하는 인식 및 정서를 과연 '항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반일'의 의미에 가깝다. 우리가 드라마 속에 흘러나오는 기미가요나 욱일승천기와 비슷한 이미지의 대상만 가지고 분노하는 것은 그저 역사 인식이 결여되고 과거사에 대한 불편한 기억 속에서 비롯된 '반일' 감정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정말 과거사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의해서 망국의 길을 걷게 된 역사적 원인 및 배경을 알고 있어야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망국의 책임을 고종과 노론에게만 씌울 수는 없다.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당시 국제적 정세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다.

 

과거사, 즉 일제 강점기의 근대사는 단지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말끔히 지워낼 수 있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우리의 역사는 함께 지키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또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세울 수 있도록 정부뿐만 아니라 대중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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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1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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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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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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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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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4 1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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