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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살고 싶으면 입 다물라', 궁녀(宮女), 삶의 존재 이유
궁중 속 애욕과 광기의 정사를 그린 《후궁: 제왕의 첩》(2012)
궁녀의 치정 살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궁녀들 간의 암투를 묘사한 《궁녀》(2007)
요즘 극장가에서 흥행 선두를 달리고 있는 영화 중에 최고의 핫(Hot)한 영화가 바로 《후궁: 제왕의 첩》이다. 여배우의 전라노출과 농도 짙은 배드씬 장면이 꽤 있는 19금 영화라는 장르의 제약 속에서도 전국 관객 200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한순간 어긋난 사랑으로 인해서 후궁에 들어가게 된 '화연'(조여정 役)과 단지 그녀를 소유하려다 못해 욕망과 광기에 눈이 멀게 된 권력자 '성원대군'(김동욱 役) 간의 애욕의 정사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후궁을 여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저 '비밀'의 역사로만 알려진 궁중의 내막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후궁》이 개봉되기 5년 전에는《궁녀》라는 이름의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이 영화 역시 19세 미만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궁녀의 에로티시즘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자살로 위장된 궁녀의 치정 살인사건 해결을 중심으로 드러나는 궁녀들 간의 은밀한 암투를 중심으로 그려낸 미스터리 장르의 영화다. 《후궁》보다는 《궁녀》야말로 영화로 재현된 궁녀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궁녀》를 촬영하기 위해 메가폰을 잡았던 김미정 감독은 《후궁》에서는 각본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편의 영화만 가지고 '궁녀'라는 존재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과연 우리에게 '궁녀'는 어떠한 존재일까?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2/0623/pimg_736553166769412.png)
충남 부여에 위치하고 있는 낙화암에는 지금까지도 바다로 몸을 던진 백제 최후의 왕 의자왕의 삼천궁녀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사적 일화는 역사학계에서는 '허구'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백제의 삼천궁녀에 대해서도 어떠한 실질적인 역사적 문헌도 단 한 개도 없다. 백제의 사비 성 인구가 5만 명 정도 추산한다면 이 '삼 천'이라는 숫자는 과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세의 호사가들이 역사적 장면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그나마 가장 큰 숫자를 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단 '궁녀'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낙화암에서 뛰어 내렸다던 백제의 삼천궁녀다. 이 역사적 일화 덕분에 지금까지도 의자왕(?~660)은 나라를 망친 방탕한 군주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내들 부럽지 않을 정도로 무려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를 거느린 진정한(?) 군주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의자왕의 이미지 덕분에 궁녀는 단순히 왕 한 사람을 위한 성 노리개 정도로만 치부하고 있다. 이번에 개봉되어 상영중인《후궁》까지 더해진다면 궁녀는 권력자의 파멸을 이르게 하는 무시무시한 한국형 '팜므 파탈'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장되면서도 편협된 역사적 증언과 영화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위해 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영화 속 궁녀의 이미지를 따로 놓고 본다면 궁녀의 삶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전혀 다르다.《궁녀》 포스터를 살펴보면 '살고 싶으면 입 다물라' 라는 문구가 눈에 띌 것이다.
그렇다. 정말로 궁녀는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궁녀는 '궁(宮)의 여자', 한편으로는 궁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왕'의 여자이기도 했다. 궁녀들은 궁중 안에서 한평생 왕이나 왕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좌해야 했다. 백성들에게는 '위대한 군신(君神)'과 다름없는 왕족의 사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에 제한적인 삶을 살아야했다. 그래서 결혼 적령기가 되어서도 결혼을 할 수 없으며 궁녀로서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궁궐 밖으로 나가서도 궁녀들에게 결혼은 '금지'에 가까운 금기였다. 궁녀가 궁궐 외부의 사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면 왕의 사생활뿐만 아니라 궁정 생활에 대한 모든 것을 발설하게 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녀는 궁 안으로 들어오게 된 이상 왕족의 눈 밖으로 나지 않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을 삼가해야만 했다. 궁중 생활에 대해서 함부로 말했다가는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할 수도 있으며 진정한 '왕의 여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발로 걷어차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비록 현존하고 있는 역사적 문헌을 통해서 본다면 낮은 신분의 궁녀가 '왕후'가 된다는 것은 단 1%에 불과할 정도로 희박했지만 말이다.
궁녀, 신분 상승을 꿈꾸다
우리가 '궁녀'라는 존재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의 여성들이 '궁녀'가 된 이유를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궁녀는 왕족들의 생활에 가장 밀접한 계급이기 때문에 궁녀 선발 과정은 좀 복잡하다. 간답하게 설명하자면 기본적으로 궁녀의 선발 조건은 각사(중앙 정부의 관청)에 소속된 여자 종(공노비)들이다. 양인의 여성들도 궁녀가 될 수 있었지만 이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의해서 선발되었을 뿐 궁녀 선발 규정에서는 양인 여성들은 궁녀로 뽑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궁중 내에서 발생한 역모사건의 진상을 기록한『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서 양인 출신 여성들이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서 궁녀가 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정으로 인해서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입궁하여 궁녀가 되었던 것이다. 천이라는 이름의 나인(內人)은 한양에서 과부로 살다가 생계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궁녀가 되었으며 명순이라는 궁녀는 열세 살 때 궁중 행사를 보기 위해서 가족들과 함게 구경하러 갔다가 아예 그곳에서 광해군 세자의 나인이 되었다. 명순이 화려한 궁중 행사에 넋 빠져 넓은 궁중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바람에 궁녀가 되었다기보다는 그녀의 부모가 당시 생계가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딸을 궁궐로 입궁시켰다고 볼 수 있다. 명순이 궁녀가 된 이유에는 그 당시 조선 백성들의 궁핍한 실상과 동시에 조선의 여성으로서의 겪어야 하는 사회적 진출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양반이 아닌 이상 생계를 제대로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양인의 딸로 태어난 조선의 여성들은 양인 남편의 아내로서 일생을 살아가야했다. 어찌 보면 조선의 여성이 궁궐로 입궁하여 궁녀가 된다는 것은 조선의 여성들에게는 그나마 제한적인 자신의 지위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진출을 위한 기회였다. '궁녀'라는 것도 궁중 내에 있는 모든 잡일을 도맡아야하는 노동을 하면서 월급을 받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된 궁녀가 된 양인 여성들의 사연 이외에도 신명호 교수가 발굴한 궁녀에 대한 잡다한 정보가 기록된 사료들을 추려 본다면 궁녀는 다른 조선의 여성들에 비해 자신이 처한 사회적 진출의 한계를 어떻게든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유난히도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궁녀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는 다르게 상궁 박씨는 궁녀라는 지위의 한계 속에서도 부동산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궁에서 주는 월급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상궁 박씨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 증식에 노력했다.
13년이 흐른 후 상궁 박씨는 또다시 부동산을 매입한다.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매입하지 않고 자신의 남자 종 대복(大福)을 시켜 매입하도록 했다. 그 사이 노비도 샀다.
- 신명호 『궁녀: 궁궐에 핀 비밀의 꽃』시공사, p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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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개봉된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속 장면.
연산군(右, 정진영 役)과 장녹수(左, 강성연 役)
공전에 최대 흥행관객 수를 기록했던 이준익 감독의《왕의 남자》와 1995년에 방영된 동명의 사극 드라마 덕분에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장녹수(?~1506) 같은 경우에는 노비의 신분에서 왕의 후궁까지 오르게 된 신분 상승에 성공한 궁녀의 대표적인 케이스다. 가난한 노비의 딸로 태어난 장녹수는 어려서부터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녀에 대한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그렇게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는 아니었지만 가무에 출증한 재능 덕분에 자신보다 연하인 연산군(1476~1506)의 눈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와 신분을 초월할 정도로 장녹수와 연산군은 예술적 교감이 가능했고 친모 폐비 윤씨(1445~1482)에 대한 결핍이 강하게 자리잡았던 연산군은 연상의 장녹수를 통해서 자신의 결핍한 모성애를 채우고자 했다. 이러한 왕의 총애를 받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 덕분에 장녹수는 후궁에 맞먹을 정도의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장녹수의 일생은 상궁 난이(?~1623)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궁녀는 죽을 때까지 자신과 한 번 맺게 된 주인을 섬겨야 했으며 그 주인이 살아 있다하더라도 다른 주인을 섬기게 된다면 그것은 '배신'에 가까운 행위였다. 하지만 선조의 두 번째 왕비인 인목대비 김씨(1584~1632)의 궁녀였던 난이는 자신의 신분 상승을 꾀하기 위해서 주인을 배신했던 궁녀의 사례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난이는 번번이 상궁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치게 되자 광해군(1575~1641)과 인목대비 김씨 사이의 갈등을 기회로 삼아 광해군 쪽의 궁녀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난이는 인목대비 김씨를 핍박하기 위해서 인목대비 김씨 밑에서 일하는 궁녀들을 포섭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위해서 앞장 섰다. 하지만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자 승승장구했던 난이의 운도 여기까지였다. 그녀는 역적의 몸이 되어 그 해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사랑 그리고 성적 욕구마저도 억압했던 궁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궁녀는 입궁하게 된 순간부터 '여성'으로서의 지위를 거의 반 정도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다. 일단 궁궐 내에서도 사내와의 연정을 품어서는 안 되었고 당연히 결혼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결혼을 한다고 해도 궁녀들은 신랑 없이 혼례를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의적으로 한편으로는 강제적으로 성적 욕구를 억제해야만 했다. 하지만 궁녀들도 당연히 '여성'이기에 어떻게든 성적 욕구를 표출하고자 했다. 궁녀들은 네 다섯 명 정도 한 방에 생활했다. 이러한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궁녀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특히 사춘기에 가까운 어린 나이에 입궁한 젋은 궁녀 그리고 네 살이라는 너무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 외간 남자를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살아야했고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궁녀들에게는 사랑과 성이 금지된 궁궐 내 생활이 무척 답답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궁궐 내의 궁녀들 간의 동성애를 '대식'이라고 하는데 궁궐 내 대표적인 동성애 스캔들이 바로 세종(1397~1450)의 큰며느리 세자빈 봉 씨와 궁녀 소쌍과의 관계다. 남편인 문종(1414~1452)이 워낙에 공부를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한 모범적인 성격이다보니 봉 씨는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한 채 독수공방으로 지내야만 했다. 결국 목 말라하던 사랑에 대한 갈증을 자신의 밑에 있던 궁녀 소쌍와의 동성애를 통해서 해갈했다. 사랑의 결핍에 괴로워했던 봉 씨에게 소쌍은 단순히 육체적 동성애 상대가 아닌 정신적 사랑의 상대로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 둘 간의 은밀한 관계가 궁중 내에서 소문이 나게 되었고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세종은 격노하여 세자빈 봉 씨를 폐위시켜 궁궐로 쫓아내버리고 말았다.
완전한 '여자'가 되지 못한 '궁의 여자'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험 매슬로우(Abraham H. Maslow)는 인간에게는 다섯 가지의 목표 또는 기본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욕구계층론(욕구단계설)'을 주장했다. 매슬로우가 규정하고 있는 '다섯 가지의 욕구'는 다음과 같다. 생리적 욕구(physiolosgical need), 안전에 대한 욕구(safety need), 사랑 또는 소속에 대한 욕구(belongingness or love need), 존경에 대한 욕구(esteem need) 그리고 자아실현(need for self actualization)이라는 최종적인 욕구가 그것이다.
매슬로우의 욕구계층론에 따르면, 개인은 하위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 단계의 욕구를 추구한다고 보고 있다. 이 이론은 인간은 경제적인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인 존재임을 밝혔다는 데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만약에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 다섯 가지의 욕구 중 단 한 개도 발현되지 않는다는거나 혹은 충족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자신이 진정 추구하고자하는 삶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리라. 그래서 욕구는 삶의 목표를 위한 행동의 동기 유발 요인이 되는 동시에 인간의 복잡한 성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일종의 스펙트럼(spectrum)이기도 하다.
신명호 교수의『궁녀: 궁궐에 핀 비밀의 꽃』을 통해서 소개한 궁녀들의 삶을 매슬로우의 이론에 도입해본다면 궁녀는 우리보다 더 욕구에 대한 본능이 강했고, 그것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생리적 환경을 보장받는다거나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자진해서 궁녀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궁녀 경력이 쌓이게 되면 궁궐 내에서 돌아가는 권력의 흐름을 파악하게 된다. 자신이 섬기고 있는 권력 있는 왕족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하며 그것을 잘 이용해 후궁이라는 최상의 궁극적 지위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궁녀들에게 단 한 가지 욕구가 없었다. 아니, 궁녀가 된 이상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될 욕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또한 '여성'의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여성이라면 가지게 되는 본능적인 욕구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사랑에 대한 욕구'이다. 궁녀들 또한 천상 여자이기에 이성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궁녀의 삶을 살아가게 된 이상 '사랑'과 '결혼'은 금지 행위다. 그리고 성적 욕구를 누릴 수 있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마저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다. 이러한 수준이라면 궁녀들은 여성으로서의 지위를 거의 상실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 이제 궁녀를 왕을 위한 성 노리개라고 말할 수 있는가? 궁녀는 '궁녀'이기 전에 연약한 여자였다. 비록 평생을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물고 살아야 하는 게 궁녀들의 삶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다양한 욕망을 품었으며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인생도 있었다. 마찬가지 그들도 인간이었고 여자였던 것이다. 어쩌면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았고 불행한 여성은 바로 궁녀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녀들의 삶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비밀에 가려져 있기에 역사적 고증이 불가능할뿐더러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마저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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