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작동시키는 '행위자'는 '아는 것이 없다.'
니체에 따르면 “행위자”는 “아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양심이 없다”. 이 말은 행위자가 작동하는 순간 항상 자신의 지식과 기억의 한 단면만을 이용한다는 뜻이다. 행위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간은 결코 자신이 가진 기억의 전체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기억의 토대는 항상 단편적으로 이용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은 인간의 근본적 한계를 말해 주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과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한다. 다시 니체를 언급하면, “행위자는 하나를 행하기 위해 대부분의 것을 망각하며, 그는 자신의 배후에 있는 것에 대해 불의를 행한다. 그가 아는 유일한 권리는 이제 생겨나야 할 것의 권리다.” 이러한 부당한 망각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덕이 양심을 만들었지만, 그것 또한 그렇게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pp 85)
우리는 살아가면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들의 파편을 통해서 지나간 시간 속으로 잊혀진 일들을 재현한다. 하지만 니체의 말대로라면 '기억'을 작동시키는 '행위자'는 '아는 것이 없다.' 과거의 일들을 부분적으로나마 기억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체 중에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다.
예전에 본 드라마나 영화는 얼마든지 재방송을 통해서 다시 볼 수 있다. 방영될 때 고려해야하는 편성 시간상 문제 그리고 방송 심의로 인해 불가피하게 의도적으로 장면이 삭제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는 과거에 봤던 영화나 드라마의 원본을 일 년이 지나도, 십 년이 지나도 그 때 본 이미지와 장면들은 그대로 볼 수 있다. 만약에 우리 인간의 기억력도 영화, 드라마를 보고 싶을 때마다 재방송을 보듯이 완벽하게, 그것도 전체적인 것들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찌 보면 정말 신에 가까운 초인적인 능력으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왼벽한 기억력을 가지게 된다면 오히려 살아가는 데 불편해질뿐더러 인생이 불행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항상 좋은 일들만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두 번 다시 기억하기도 싫은 불행한 일들도 우리의 삶을 때때로 실의에 빠뜨리거나 심하면 평생 지을 수 없는 기억의 상흔이 되기도 한다. 영화, 드라마를 마음대로 다시 보기 기능이 있는 IPTV처럼 보고 싶은 장면만 골라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의 기억력은 좋은 일들은 항상 기억해두려고 하고, 반대로 안 좋은 일들은 애써 잊어버릴 수 있다. 비록 전체적인 것을 완벽히 기억할 수 없지만 그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것만 스스로 기억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력의 한계에 대한 니체의 말은 완벽함을 갖추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 망각을 함으로써 불필요하고 좋지 않았던 감정과 기억들을 비워내버리고 거기에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감정을 담아낸다. 이러한 과정이 있기에 인간은 항상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스스로 변화를 추구하려고 한다.
기억과 회상
17세기와 18세기 고대 기억술의 특권이 몰락하면서 회상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중략)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는 저장기억을 태곳적 선상의 비상식량과 비교하였다. 가령 정신이 메마를수록 기억의 수용량은 점점 더 불확실해진다는 것이다. (pp 119)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빠르게 변화되어만 가는 삶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정신은 욕망, 피로 등 온갖 부정적인 마음 요소로 인해 황무지처럼 메말라간다. 이제는 생물들이 살 수 없는, 허허벌판 모래만 남아 있는 사막은 원래는 황무지가 아니었다. 옛날에는 사막도 인간과 동물들이 살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늘 푸른 식물들이 자라났고 목을 축일 수 있는 물도 흘러 지나갔던 녹색지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푸르름을 유지했던 녹색지대는 점차 줄어들게 된다. 인간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서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고 삼림지는 목축지로 변해만 갔다. 가축으로 기르게 된 소들은 목축지에 자라난 풀들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동안 인간과 소에 의해 녹색지대는 점차적으로 파괴되어갔고 이제는 식물들이 자라날 수 없는 황폐한 땅으로 전락하고 만다. 식물들이 자라나지 못하자 그 곳에 정착 생활을 한 인간, 동물들도 설 자리도 줄어들었다. 그래서 동식물이 살 수 없는 불모지의 사막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제는 그 누구도 사막이 원래 녹색지대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원래 모습을 재생하기가 불가능 할 정도로 불모지가 되었듯이 인간의 기억력도 정신이 메마를수록 불확실해질 수밖에 없다. 지나간 일들을 잠깐이나마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마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일상에 파묻히게 되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의 수용량이 줄어들게 된다. 특히나 매일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정보기술의 등장은 인간의 기억력을 대신해주는 역할을 한다. 수많은 정보들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저장될 수 있다. 굳이 정보를 머릿 속으로 기억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기억
윌리엄 워즈워스
기록할 펜 그리고
잠긴 서랍을 열어 줄 열쇠는
시인들이 의미 있게 기억을
비유한 목록이다.
또한 기억의 손에
붓을 쥐어 줄 수 있다.
그러면 여기저기에 부드러운 윤곽을 그려
마음의 소원을 채워 주리라.
지나간 고난을 풀어 주고 찌푸린
분노의 주름을 펴 주고
오래전에 사라진 행복을 살려 와
반짝이는 광채로 채색하리라.
그 붓은 환상의 도구처럼
외롭게 감추어져 있는
양심을 일깨우는
저 유령들을 크게 만드나니.
오! 빨리도 사라지는 우리의 인생이
그런 순수함에서 만들어졌다면
과거의 어떤 기억도
이 붓 자국을 두려워하지는 않을 텐데.
인생의 황혼에서 평온한 마음으로 매 순간
저 고요한 풍경을 바라볼 수 있으련만.
그리고 연륜도 만족스럽고 밝게
그 붓끝이 가리키는 안식처로 떠날 수 있으련만.
얼어붙은 달빛 비치는
그요한 호수같이,
그것도 아니면 절벽과 심연을 굽이 도는,
멀리서 그 물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계곡 같은 마음으로.
(pp 123~124)
‘기억’과 ‘회상’. 살아가는 데 많이 사용되고 있는 익숙한 두 단어의 의미가 서로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국어사전에 기록된 의미를 소개하자면 ‘기억’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내는 행위라고 보고 있으며 ‘회상’ 역시 ‘기억’의 의미와 유사하지만 ‘기억’의 의미와 확연하게 구별된다. ‘회상’은 한 번 경험해고 접했던 사물이나 일상을 재생한다는 의미가 있다. 어찌 보면 우리가 행하고 있었던 기억이라는 기능이 '회상'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실제를 재생하는 회상, 현실인가 상상인가
저장기억의 기록술과 저장 기술의 자리에 회상력이 오게 되었는데 그 회상은 매우 자유롭게 현재 기록된 자료를 작업한다. 그 기억력의 과제들은 워즈워스의 작품들에서는 포괄적인 의미로 보면 다듬고 치료하는 것이다. 환원하면 그의 작품에서 희미하게 퇴색된 것은 새로이 채색되고, 잃어버린 것은 복원되며, 고통스러운 것은 경감된다. 이러한 상흔들은 회상을 통해서 사실 완전하게 치유될 수는 없지만 경감되기는 한다. (pp 125)
워즈워스는 회상'을 지나간 시간 속에 잃어버린 것들을 복원할 수 있고 부정적인 기억의 상흔들은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는 기능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단순히 '저장'의 용도로만 사용되었던 '기억'을 대신하게 되는 좀 더 개방적이면서도 포괄적인 기능으로 재조명한 것이다.
기호 자체는 마음대로 처리 가능하고, 책장을 펼쳐 다시 읽을 수 있으며, 어떤 장소 또한 다시 방문할 수 있지만, 그런 것들과 관련된 느낌은 자동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회상기억은 원래 기억의 빛바랜 여운에 불과한 것이다. 어떠한 길도 그런 원래의 기억으로 우리를 데려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낭만주의적 회상기억은 재생이 아니라 기억의 대체물이다. 그것은 틈 사이의 소용돌이, 즉 시적 상상의 증보판이다. 기억이 신뢰할 만한 과거의 재생이라는 환상을 워즈워스는 갖지 않았다. (pp 136)
워즈워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회상’의 기능이 기억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회상력을 통해서 희미한 기억들을 다시 복원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기억의 상흔을 치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완전한 치유는 불가능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회상’이라는 정신적인 행위도 중요하다. 더 나아가면 ‘회상’이 심리치료에 있어서 새롭게 적용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워즈워스는 '회상'을 완전한 재생이 가능한 기능으로 보지 않았다. 인간의 기억 능력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겪어야 할 불변의 한계이기 때문에 회상 역시 완벽하게 재생할 수 없다. 워즈워스도 '인간'이기에 회상의 한계적 기능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대신에 낭만주의자답게 워즈워스는 실제적인 재생을 의미하는 회상의 기능이 작동될 수 있도록 '상상력'을 첨가했다. 인간의 정신 속에서 발현되는 공상, 환상의 감정들을 통해 재생불가능한 회상의 한 단면을 채우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워즈워스의 '회상'은 '비현실적인 실제 세계'라는 역설성을 지닌 정신적 행위다. 실제 있었던 일을 재생되는 기억을 '현실'이라고 볼 수 없고, 그리고 그것을 '상상'이라고도 할 수 없는 모순적인 의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낭만주의가 팽배했던 17~18세기는 이러한 회상의 기능을 용인할 수 있었다. 감성의 해방, 환상적인 세상에 대한 동경을 추구했던 낭만주의 문학가들이었기에 가능했다.
안정되지 않음, 상실과 후발성은 워즈워스에게 인간 조건의 특징들이다. 자연은 신성하고 영구적인 데 반해, 문화는 근본적으로 멸망과 보상할 수 없는 손실에 의해 위협받는다. <서곡> 제5권 서막에서 워즈워스는 자연은 재해를 입은 후 기적의 손이라도 있는 것처럼 복구되지만, 인간에게는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자동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중략) 워즈워스는 문화와 기억을 잃고 난 후 스스로 살아남아야 할 천형을 받은 인간의 우울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pp 141~142)
인간은
이 대지의 아들인 한에는 거의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가짐을 탄식'하게 된 것이리라.
또한 설마 자멸하는 일은 없어도, 살아남아서
무참히, 영락하여, 버려진 채, 쓸쓸하게 될 것이리라.
(워즈워스 <서곡> 제5권, 24~28행)
그러나 '상상력'만으로 회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절대로 찾아낼 수 없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끝없는 재생을 추구하게 되는 부조리한 인간의 존재와 한계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결국에는 실제에 있었던 과거의 일 그리고 그 과거의 일을 회상함으로써 복원된 또 다른 과거는 서로 불일치 할 수밖에 없고 서로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실제 과거와 재생을 통해서 복원된 과거에서 비롯된 괴리감 그리고 과거를 완벽하게 재생할 수 없다는 한계에서 느껴지는 상실감과 허무함을 낭만주의자 워즈워스는 거기에 ‘상상’, ‘꿈’이라는 비현실적인 정신을 채우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우울하고도 절망적인 환상만 있을 뿐이다.
회상을 위한 기억의 습작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인 허무함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워즈워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과거에 대한 회상을 위해서 때때로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화다. 요즘 개봉된 <건축학개론>이 수많은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영화라는 허구의 세계를 통해서 잊혀진 과거를 회상하고자 하고 그것을 재생, 복원하려고 한다. 과거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영화 그리고 스크린 속에 흘러나오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의 애잔한 멜로디와 함께 음미하는 것이다.
비록 영화를 통해서도 과거를 완벽하게 '기억'할 수도 없고, '회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기억'과 '회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완전한 채색을 할 수는 없지만 과거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남아 있다면 회상에 대한 기억의 습작은 필요하다. 단면적인 기억의 일부분이 가능한 정신적인 습작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삶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정신적인 여유와 감성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사라져갈 정도로 점점 황폐화되어 사막이 되어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