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등정의 발자취 - 개정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 김은국. 김현숙 옮김, 송상용 감수 / 바다출판사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르네상스형 괴물, 켄타우로스 케이론

 

 

 

 

 

폼페오 바토니  <아킬레우스를 가르치는 케이론>  1746년

 

 

 

 켄타우로스는 상체는 인간이고 하체는 말의 형태를 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그들은 야만적이어서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난폭한 성질을 지녔다. 또한 음탕할 정도로 여색을 좋아해서 종종 님프(nymph)나 신족들 앞에서 추태를 부리기도 한다. 몸에서 말(馬)의 부분은 태양에 속하는 남성적인 힘을 나타내며, 이 힘을 다스리는 정신이 상반신을 이루는 사람 부분에 있다. 요컨대 켄타우로스는 덕성과 판단력이라는 인간의 고귀한 본성과 대비되는 인간의 저열한 본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모든 켄타우로스가 호전적이고 난폭한 건 아니다. 케이론이라는 이름의 켄타우로스는 선량하고 정의를 존중하는 온화한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의술, 음악, 수렵, 예언에 능통하여 헤라클레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 등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많은 영웅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아킬레우스를 가르치는 케이론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은 대부분 활을 쏘는 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장면이 많다. 그러나 케이론은 수많은 영웅들에게 궁술, 수렵만 가르쳤던 것은 아니다. 케이론은 켄타우로스 일족 중에서 유일하게 박학다식한 현자였다.

 폼페오 바토니가 묘사한 장면에서 케이론은 아킬레우스에게 수금을 켜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젋은 아킬레우스 뒷편에는 지구의가 있는 걸로 봐서는 케이론은 지리학도 가르쳤나보다. 하지만 지구의가 존재하기에는 아킬레우스가 활동하던 신들의 세계는 지리학, 천문학이라는 학문도 존재하지 않았던 너무 먼 옛날 시절이다. 바토니는 지구의를 조그맣게 그려넣음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케이론의 박학다식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록 아킬레우스는 성인이 되면서 수금 연주를 통해 음악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보다는 그리스의 오랜 적국인 트로이를 공략하는 데만 열을 올렸지만 말이다.

 

 앞에서 켄타우로스를 날 것 그대로의 야만성과 덕과 정신이 다스리는 인간의 본성이 결합된 혼합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케이론은 인간이라면 알아야 할 학문과 예술이라는 지식의 분야를 동시에 습득하고 있는 르네상스형 인간, 아닌 '괴물'로 볼 수 있다.

 르네상스형 인간이란 한 분야가 아닌 다양한 곳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을 말한다. 누구보다도 더 호기심과 탐구력이 강하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문학이던 과학이던 예술이던 골고루 습득하고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들 간의 링크가 잘되어 있다.

 <인간 등정의 발자취>의 저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는 20세기의 마지막 르네상스형 인간인 동시에 과학과 예술 간의 밀접한 지적 사유 과정을 집대성할 줄 아는 현대의 케이론이다. 그의 마지막 지적 활동의 결과물로 남게 된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인류의 정신 및 지성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진보'라는 인간의 등정이 지성사에 미친 영향

  

 브로노우스키는 인류 지성의 진보적 발전을 '인간 등정'으로 비유하고 있다. 인간의 체력으로는 높은 산 정상까지 뛰어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산 정상에 빨리 오르고 싶은 마음에 처음부터 빠른 걸음으로 산에 오르게 되면 체력적 소비가 많아져 정상에 도달할 수 없다. 비록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한걸음씩 한걸음씩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산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산에 오르는 과정을 인류의 진보에 비유하자면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단 한 번만에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봉우리가 또 다른 봉우리의 발판이 되는” 유기적 여정을 거친 끝에 만들어졌다.

 아기는 걸음마를 떼고 스스로 일어서면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갈 기본적인 준비를 마친다. 인간의 조상도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되었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커진 두뇌와 자유로워진 두 손은 창조의 모체가 된다. 인간은 과학과 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놀라운 창조물들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인류의 진보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최초의 과정이다.

  나무와 돌을 깎기 시작했을 때 인류는 다시 한 번 진보했다. 브로노우스키는 ‘사물을 쪼개고 깎는 것은 흙을 뭉쳐 토기를 빚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일’이라고 말한다. 깎는 행위를 통해 인간은 사물의 본성을 파헤쳐 구조와 법칙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돌덩이 내부에 있는 형상을 망치로 해방시킨다’고 생각했던 조각가 미켈란젤로처럼 인간은 깎으며 분석하고 이때 발견한 법칙을 토대로 사물을 재구성했다. 연금술 역시 금속의 숨겨진 구조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인간 등정의 일보 중 하나였다.

 이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부터 잉태된 진보는 예술과 종교 등의 영역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르네상스 미술을 발전시킨 원근법은 단지 중세 미술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원근법은 신의 관점으로 사물을 배치하는 중세의 예술관을 붕괴시켰고, 수학을 시간과 연동되는 역동적 사유양식으로 발전시켰다. ‘눈에서 빛이 나오는 게 아니라 물체에서 빛이 나온다’는 이슬람 물리학자 알 하젠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원근법은 예술을 넘어 과학과 종교, 세계관의 붕괴로 이어졌다.

 

 

 

 

 '도덕적 상상력' 없이는 인류의 진보는 없다

 

 케이론은 비록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이지만 그는 이성과 지혜를 두루 갖춘 박학다식한 현자였기에 오늘날에는 포악한 짐승에 가까운 켄타우로스 일족과 구분하고 있다. 케이론은 수금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지만 켄타우로스 일족은 그저 술만 마시고 아무 님프나 잡아서 추태 부리는 짐승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이처럼 브로노우스키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상상력의 자질에서 비롯된 창의적인 정신의 능력이라는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창의적인 정신의 능력은 예술과 과학이라는 분야를 통해서 구현하고 있는데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귀한 선물'인 것이다. 이런 믿음 하에 브로노우스키는 인류의 진보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실 브로노우스키의 관점은 오랫동안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인간중심적 사고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은 과학과 예술을 통해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인간의 진보를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을 절대 지식으로 여기는 인류의 오만과 무지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절대적인 확실성을 신봉하는 독재자들의 신념으로 과학과 인류 진보가 후퇴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현대로 오면서 핵물리학의 발전이 오히려 인류를 파괴할 수 있다는 레오 실라드의 진언과 현실로 나타난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통해 과학의 오용 가능성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찾고자 한다.

 특히 책이 쓰여진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는 인간의 고유한 정신을 배반하면서까지 목적보다는 수단을 정당화하는 데 과학을 이용하는 사회적 흐름을 우려하고 있다.

 

 

“인간이 현실적으로 시험해보지도 않고서 절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인간이 신의 지식을 갖고자 할 때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과학은 지식의 그야말로 인간적인 형태이다. 우리는 항상 알려진 것의 첨단에 있으면서 바라는 것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 한다. (중략) 우리는 절대 지식과 절대 힘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pp 416~420)

 

 

 

 오늘날의 과학은 사회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과학의 고삐를 쥐고 흔들기를 원하는 정부와 갈등을 빚게 된다. 이 때문에 과학이 할 일은 지상의 부(副)가 아니라 도덕적 상상력을 계승하는 데 놓여야 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도덕적 상상력이 없이는 인간과 믿음, 과학은 함께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케이론과 같은 존재가 있어야 사회의 발전은 물론이고 훌륭한 인재가 탄생하듯이 브로노우스키는 이와 같은 과학의 바탕이 확립될 때 진보의 ‘인간 등정’도 여전히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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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10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대 신, 인간, 자연을 서로 분리시키고, 자연을 인간이 정복해도 좋은 대상으로 바라본 서구의 사상적 배경은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경쟁의식을 잉티했대고 저는 봅니다.

아, 그리고 '절대 지식과 절대 힘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제가 해당 책을 읽지 못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는 것이랍니다)

아주 좋은 글 잘 일었습니다.

cyrus 2012-01-11 19:14   좋아요 0 | URL
제가 인용한 문장에서 중간 내용을 일부러 생략해서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네요 ^^;;

저자는 원시 시대부터 원자폭탄이 등장하는 현대까지(이 책이 1970년대쯤에
다큐로 만들어진 것을 토대로 출판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조망해보면서
인간이 과학과 예술을 다룰 줄 아는 능력 덕분에 무시무시한 원자폭탄까지
제조할 수 있는 진보가 이뤄질 수 있다고 보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이러한 능력을 예찬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능력,
예를 들어서 과학의 힘을 절대적으로 보며 맹신하게 되면
결국에는 인간 우리 스스로 파멸하는 길로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어요.
원자폭탄 같은 경우에도 결국 과학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은 정치세력들의 탐욕이 만들어 낸 위험한 무기가 되었잖아요.

그래서 과학을 인류의 진보를 위한 인간만의 절대적인 지식 또는 힘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존재가 서로 상생하는 도덕도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많이 추천되는 책이고 과학 분야 도서치고는
어렵지 않은 게 장점이에요.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해요 ^^


차트랑 2012-01-11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 생략을 해서 죄송합니다.
(맥락을 무시한 생략은 큰 오해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 인정합니다)

제가 인용한 부분은 "(중략) 우리는 절대 지식과 절대 힘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pp 416~420)"입니다.

아, 그리고 좋은 말씀해주시고
독서 목록에 포함 시킬 수 있도록 해주신 점
고맙습니다.

그리고 좋은 글을 써주셔서 역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