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여름 밤의 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평점 :
한여름 밤, 마법의 숲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판타지
<한여름 밤의 꿈>은 그동안 영화, 연극, 음악, 무용 등으로 너무나 많이 만들어져 조금 식상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오래전에 쓰여진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이 만들어낸 유쾌한 '판타지' 때문일 것이다.
허미아와 라이샌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허미아의 아버지 이지우스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두 사람은 밤중에 몰래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기로 하는데, 바로 이 계획을 헬레나가 알게 된다. 헬레나는 허미아를 짝사랑하는 드미트리어스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다. 하지의 전날 밤, 라이샌더와 함께 도망가는 허미아를 찾기 위해 드미트리어스가 숲으로 들어오고, 이 드미트리어스를 찾아 헬레나도 숲으로 들어온다. 3쌍의 연인이 숲으로 모이게 되면서 사랑의 백일몽이 시작된다.
그들의 꿈이 단지 백일몽이었던 건 요정들의 장난스러운 마법으로 인해 연인들의 사랑싸움을 한층 소란스럽고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헨리 퓨젤리 <요정들에게 둘러싸인 티타니아가 깨어나다> 1793년
티타니아: 주무세요. 내 팔로 감아 안아 드릴께요. 요정들은 물러가라. 사방으로 멀어져라.
(요정들 함께 퇴장)
담쟁이도 아름다운 인동 덩굴 이렇게 부드럽게 감으며, 암송악도 껍질 덮인
느티나무 가지를 이렇게 둘러싸요. 오. 정말 그대 사랑해요!
난 정말 혹했어요!
- 4막 1장 중에서, pp 79~80 -
이 야단법석은 숲을 지배하는 요정의 왕 오베론과 왕비 티타니아의 부부싸움에서 시작된다. 잠깐의 다툼에 약이 오른 오베론은 티타니아를 골탕 먹이려고 요정 퍽에게 마법의 꽃을 구해 오라고 명했다. 마법의 꽃으로 만든 즙을 눈에 바르면 눈을 뜨고 나서 맨 처음으로 보는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꽃의 즙이 눈에 닿은 요정의 여왕은 하필 못생긴 얼굴의 당나귀 인간 바틈을 처음 바라보게 되고, 순식간에 사랑의 마법에 빠져들고 만다.
퍽의 깨알같은 실수 연발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재미가 더욱 배가된다. 드미트리어스를 향해 열렬하게 구애하는 헬레나를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 오베론은 퍽에게 마법의 꽃즙을 드미트리어스의 눈에 뿌려주라고 한다. 하지만 퍽은 드미트리어스의 눈에 뿌려야 할 꽃즙을 라이샌더의 눈에 뿌리는 바람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고 만다.
어긋난 큐피드의 화살처럼 연인들의 마음은 갑자기 행로를 바꾸어 꽂히게 되고, 결혼 준비로 흥겹게 달아오른 숲은 세 커플들로 대혼란에 휩싸인다. 퍽은 자신 때문에 꼬여버린 연인들의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모두를 잠재우고 꿈 같은 하룻밤을 정리한다. 마법이 풀린 여왕은 잠에서 깨어나고나서야 여태까지 당나귀 인간에 사랑에 빠져 있었던 사실에 황당해한다.
그리고 문제의 3쌍의 연인들이 잠든 사이에 오베론은 다시 마법을 부려 라이샌더는 허미아를, 드미트리어스는 헬레나를 사랑하도록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 놓는다. 이렇게 해서 뒤죽박죽이 되었던 연인관계가 정상으로 돌아오게 됨으로써 서로의 짝을 찾은 두 쌍의 남녀가 아테네의 공작 테세우스 집에서 공작 부부와 함께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하룻밤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히다
<한여름 밤의 꿈>을 원작으로 읽어본다거나 또는 연극, 영화를 보게 되면 희곡에 등장하연 연인들이 겪게 되는 상황과 장면들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속에서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수록된 고대 신화 속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고나 인용되고 있다.
사랑에 빠진 3쌍의 연인들 그리고 요정들 이외에도 <한여름 밤의 꿈>에는 마을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인 목수 퀸스, 풀무장이 플루트, 땜장이 스타우트, 가구장이 스넉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일행과 어울리는 바틈은 원래 직업이 베틀장이다. 그들은 나흘 앞으로 다가온 테세우스 공작의 결혼식에서 선보일 연극을 연습하기 위해 숲으로 들어온다. 일행 중 한 명인 바틈이 오베론의 마법에 걸려든 것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티스베> 1909년
![](http://blog.ala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start.gif) |
|
|
|
퓌라모스와 티스베는 집안의 반대로 인해서 이웃지간임에도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이들 사랑의 장애물이 될 수가 없았다.
갈라진 벽의 작은 구멍을 통해서나마 대화를 나눔으로써
두 남녀는 불 타오는 사랑의 감정을 더욱 지펴나갔다. |
|
|
|
![](http://blog.alad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end.gif) |
그런데 마을 일행들이 선보이는 연극의 제목은 '피라무스와 디스비의 가장 구슬픈 코미디와 가장 비참한 죽음' 이다.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벌써 눈치를 챘을 것이다. '피라무스와 디스비' 는 신화 속 비극적인 사랑의 연인인 퓌라모스와 티스베를 패러디한 것이다.
여전히 이들의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너무나도 잘 알려진 고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퓌라모스와 티스베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양쪽 가문에서 서로 반대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랑의 도피를 결심하게 되지만 불행한 사고로 인해 두 사람 다 서로 목숨을 끊게 된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퓌라모스와 티스베 신화가 이야기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토대로 한 연극을 마을 일행들이 연습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바틈은 연극 속 비극적인 남자 주인공 퓌라모스 역을 맡게 된다. 무식한 바틈은 자신이 맡게 된 퓌라모스 역이 어떤 역할인지 모르고 있지만 비록 오베론의 마법에 의한 것이지만 바틈 역시 퓌라모스처럼 티타니아를 사랑하게 된다. 결국에는 당나귀 머리를 사랑하는 티타니아는 티스베인 것이다.
두 사람의 가슴을 태운 사랑의 불꽃은 그 뜨겁기가 같았을까, 달랐을까? 아마 같았겠지. (중략) 감추면 감출수록 깊어가는 게 사랑이잖아? 속으로 속으로 타들어가는 섶 속의 불씨 같은 게 사랑이잖아?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1> '퓌라모스와 티스베' 편, 민음사 pp 156~157 -
퓌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는 단지 바틈과 티타니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마법에 걸린 허미아와 라이샌더 역시 집안의 반대로 인해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할뻔한 연인이기 때문이다.
마냥 희곡 속의 코믹한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인간은 사랑에 빠지면 3쌍의 연인들 그리고 티타니아와 바틈처럼 맹목적으로 상대방만 보게 된다. 이와 관련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재미난 실험을 소개하자면 이미 연인이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이성의 사진을 보여준 후 주의력을 테스트한 결과, 대부분 주의력에 흐트러짐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참 사랑에 빠져 온통 상대방의 생각뿐인 사람들은 멋진 이성을 보고도 대부분 한눈을 팔지 않는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표현대로 한 번 지핀 불씨가 겊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활활 타오르듯이 사랑 역시 심장 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면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감정이다.
'사랑' 판타지의 마력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해프닝이었지만, 희곡 속에서는 모두가 결국 자신의 짝을 바로 찾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마법을 사용한 유혹은 결국 일탈이자 공상으로 끝난다는 교훈도 덧붙여서 말이다. 작품 말미에서 소동의 장본인인 퍽은 익살스럽게 관객들의 양해를 구하고 있다.
저희 그림자들이 언짢으셨다면 / 이러한 영상들이 보였을 때 / 잠들어 있었을 뿐이라고 /
생각만 고치시면 다 괜찮죠. / 그리고 가볍고 시시하며 꿈처럼 헛것 같은 이 주제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여러분. / 용서해 주시면 잘해보겠습니다.
- 5막 1장 중에서, pp 110 -
셰익스피어만의 유머가 묻어나 있는 희곡답게 결말 역시 유머스럽고 재치가 있다. 희곡 속 인물들만 마법의 장난에 농락당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 또는 연극을 보고 있는 독자/관객들 역시 지금까지 지켜본 사건들이 그저 작품 속의 한여름 밤의 꿈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만들어낸 판타지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혼동하게 만들어버렸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한여름 밤의 꿈>이 널리 읽혀지고 자주 무대에 오르는 이유가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사랑 판타지의 마력이 현대인들의 감성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여름 밤의 꿈>에서 펼쳐치는 사랑의 판타지들은 어떤 이들에게는 여름날 밤에 이루어졌던 꿈 같은 사랑의 추억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비록 한낱 꿈으로 남게 되지만 허미아와 라이샌더처럼 더욱 해피엔드로 끝날 사랑의 결실이 맺어질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판타지의 마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