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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의 자연사
조나단 실버타운 지음, 진선미 옮김 / 양문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씨앗을 매우 사랑한다. 씨앗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경이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조나단 실버타운 <씨앗의 자연사> pp 7에서 인용) -
씨앗 한 개의 기적
5년 전, 이스라엘의 과학자들은 무려 2000여 년이 된 종려나무 씨앗의 싹을 띄우는데 성공하였다. 이 놀라운 연구 결과는 고대 씨앗으로 싹을 틔운 사례들을 통틀어 역사상 오래된 씨앗의 발아로 기록되었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 중 최고령인 `므두셀라` 의 이름을 딴 이 씨앗은 기원 후 73년 로마군의 공격을 받은 유대인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유명한 마사다 성채의 지하에서 발견되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종려나무 씨앗은 기원전 35년에서 서기 65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간혹 해외토픽감으로 고대의 씨앗이 싹을 틔우는데 성공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몇 년 전에는 어느 책에서는 1200년 된 연꽃 씨앗을 소량의 물이 담긴 샬레에 보관해두었더니 싹을 틔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다. 연꽃의 씨앗은 다른 식물의 씨앗보다 수명이 길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심심찮게 수천년 묵은 오래된 연꽃 씨앗의 발아 소식이 학계에서 보고된다.
이 지구상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씨앗들 중에는 어떤 것은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하고 한 떨기 꽃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불량 씨앗은 쭉정이가 되어 더 이상 크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씨앗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존재, 그래서 시작과 같은 희망찬 단어와 잘 어울린다. 오랫동안 땅 속 깊숙이 잠을 자던 씨앗 한 개가 드디어 땅을 비집고 새파란 새싹 이파리가 나오기 시작한 모습은 생명 탄생의 기적을 연출하기도 한다.
씨앗, 처절한 생존의 역사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남긴 명구처럼 먼지처럼 가볍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씨앗 속에는 식물들의 복잡하고 정교한, 그리고 경이로운 생명의 잠재력이 숨겨져 있다.
<씨앗의 자연사>의 저자인 조나단 실버타운은 작은 씨앗 속에 숨겨진 놀라운 자연의 힘을 소개하고 있다. 평소에 볼 수 있는 콩에서부터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로 보잉 747 점보제트기 여섯 대를 합친 것만큼이나 거대한 자이언트 세쿼이아까지 험난한 생태계 속에서 생명의 꽃을 피우려는 씨앗들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섹스와 꽃가루받이, 씨앗 퍼트리기 그리고 하나의 싹을 틔우기 위해서 스스로 진화를 하는 등 자연선택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씨앗의 생존전략들은 동물들의 번식 과정 못지 않게 처절하기만 하다.
연꽃과 이스라엘에서 싹을 틔운 종려나무 씨앗처럼 오랜 세월을 견뎌낸 씨앗은 자신의 대사활동을 스스로 중단시킬수 있으며 오랫동안 정지된 상태를 유지하며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과는 반대로 단명의 운명을 가지는 식물의 씨앗도 있다. 포플러와 버드나무 씨앗은 전파되는 순간 수시간 이내에 심을 흙을 찾지 못하면 썩어버린다.
이처럼 씨앗이 새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씨앗이 새싹을 틔울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계절에 따라 변하게 되는 기후, 즉 습도, 온도 그리고 흙 속에 포함되어 있는 영양분 구성 성분에 따라서 자신이 성장하기에 유리한 조건이 들어맞을 때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식물이 유성생식을 선택한 이유
유성생식은 주로 암수라고 하는 두 가지 성별을 이용해서 다음 세대에 자손을 남기는 방법을 말하며 반대로 무성생식은 암수 개체 필요없이 한 개체가 단독으로 새로운 자손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일부 식물들 중에는 무성생식을 택하는 종(種)도 있지만 동물과 같이 섹스로 생식하여 씨앗과 열매를 생산하기도 한다.
18세기 중반에 ‘식물의 성’ 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는 했지만 배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난자와 정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은 이어졌다. 배아를 생산하는 역할의 정도에 따라서 난자의 역할을 비중 있게 보고 있는 난자론자와 반대로 정자의 역할을 난자보다 중요하게 보는 정자론자들로 대립되었다.
완두콩 교배 실험을 성공적으로 끝낸 그레고리 멘델은 수년 동안 조팝나물 교배실험을 통해 식물의 생식을 통한 연구를 시도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멘델은 조팝나물이 무수정식물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계에서 유성생식이 보편적인 이유는 학자들의 호기심을 늘 자극했다.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서 식물의 번식과 유성생식 간의 관계에 대해서 다양한 가설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유성생식이 선호되는 유력한 이유는 유익한 유전자들이 서로 합쳐져 유전자가 가지고 있는 이점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매 세대마다 뒤섞임으로써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유전적 다양성이 커지면 한 가지 유전자만을 가지고 있는 무성생식 번식에 비해 수많은 유전자를 동시에 가져서, 환경 변화에 따른 적응이 수월하게 된다. 무성생식은 똑같은 유전자가 후대에 전해지기에 유성생식에 비해 환경 적응에 불리하며 질병에도 취약하다.
씨앗에 숨겨진 자연 형성의 과정

르네 마그리트 <천리안> 1936년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부모가 가지고 있는 형질이 후대로 전해져 내려올 때 자연선택을 통해서 주위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하는 형질이 선택되어 살아남아 내려옴으로써 진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좋은 형질의 후손이 보존되기 위해서는 생물은 같은 종이나 다른 종의 개체와 경쟁을 해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그야말로 생존경쟁인 것이다.
다윈이 주장한 자연선택은 작은 씨앗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중복수정을 통해서 씨앗 한 개 속에 두 개의 배아가 생긴다. 그러나 3, 4억개의 정자들 중에서 단 한 마리가 난자와 결합하여 수정되듯이 씨앗 속 두 개의 배아 중 하나만 수정될 수 있다. 수정 선택에서 탈락된 배아는 수정에 성공한 배아를 위해서 내배유가 되어 배아가 발육하기 위해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준다.
씨앗의 내부에는 곧 세상 속에 등장할 자연의 세계만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여러가지 진화 과정들도 포함되어 있다. 복잡하면서도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씨앗의 종족보존 과정 덕분에 우리는 아름다운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맛 좋은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씨앗이 만들어낸 초목들은 인간의 호흡 활동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이다.
중국 고대의 사상가 노자는 ' 씨앗 속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이, 그가 바로 천재일 것이다 ' 라고 말하였다.
마그리트 속 화가처럼 알을 알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닌 알에서 깨어나게 될 생명, 즉 새의 탄생에 대한 가능성을 인지할 줄 아는 천리안을 가지고 있듯이 노자는 씨앗이 품고 있는 자연의 세계가 실현될 가능성을 눈여겨 볼 수 있는 사람을 천재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씨앗 하나가 이루게 될 자연을 탄생하게끔 만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진화의 과정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자연의 신비는 풀려지지 않은 이상 자연이 형성되는 과정은 아직 인간에는 여전히 무궁무진하고 예측불가능한 미지의 세계이다.
씨앗 속에 숨겨진 미지의 세계를 100% 이해하지 못한 인간은 노자가 말한 '천재' 의 수준은 아닌거 같다. 우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자연의 모든 것들이 조그마한 씨앗 한 개에서 비롯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심지어 씨앗의 존재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데 식물의 혜택을 받고 있는 은혜로움마저 모른다.
인간이 거대한 지구에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 씨앗 속의 세계를 볼 줄 아는 '천재' 정도는 되지는 못하더라도 씨앗이 작다고해서 이들의 존재를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면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은혜로움을 모르는 무지한 '바보' 는 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