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제, 전예원판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읽었다.
200페이지 넘지 않은 분량에다가 예전에 청소년용으로 읽어본 적이 있어서 하루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전에 읽었던 청소년용과 원전의 내용을 읽을 수 있는 완역본과 내용상 차이가 있었고 한 작품을 다시 한 번 읽게 되면 이전과 다른 새로운 감동을 얻게 되듯이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읽으면서 역시 원전 독서와 축약본 도서와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읽은 전예원판 <말괄량이 길들이기>은 초판이 1990년에 발행되었다. 지금도 전예원 셰익스피어 시리즈가 출간되고 있으며 20여년동안 순전히 신정옥 교수 혼자서 셰익스피어 작품 번역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무려 11년 전에 출간된 책이라서 그런지 오늘날 사용되어지고 있는 영어이름 표기와 많은 차이가 있다. 말괄량이 카트리나 (혹은 캐서리나)는 캐더리너로, 그녀의 아버지 밥티스타는 벱티스터로 표기되어 있다.
집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헌책을 읽었던터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영어표기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은 편이다.
하지만 방금 리뷰 작성을 위해서 알라딘 서지정보를 확인할 결과 현재 알라딘에서 판매되고 있는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2001년에 출판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알라딘에서 기재되어 있는 페이지 수도 내가 읽고 있는 1990년 초판본과 똑같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애용하고 있는 대구에 위치하는 K문고 오프라인 매장에는 2006년 발행본이 판매되고 있었다.
여기서 문득 머릿속에 스쳐 생각한 것은 알라딘에서 판매되고 있는 2001년 그리고 2006년 발행본이 1990년 초판본 그대로의 내용이 아닌 현 영어 표기법에 맞게 좀 더 내용이 다듬어진 개정판인지 무척 궁금하였다. 특히 <말괄량이 길들이기> 작품 속에서 인용되어지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내용에 대해서 상세한 각주를 달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셰익스피의 작품을 읽어보면 알게 되지만 극중 속 인물들의 대화에는 오랫동안 전해내려오는 속담 그리고 가끔 그리스 로마 신화나 고대 역사 속 인물들이 인용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오래전에 번역된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읽게 되면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의 이름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어느 정도 접한 젋은 독자들에게는 10년 전에 나온 전예원 셰익스피어 전집이 쉽게 읽혀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1990년 초판 <말괄량이 길들이기> 속 극 중의 대사 몇 구절을 인용해보겠다. 문장 속 표시된 부분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맞춰볼 것.
루첸티오 : 들었나. 트라니오! 미너바 여신이 말문을 여셨다.
- 셰익스피어 <말괄량이 길들이기> 1막 1장, 전예원, pp 40 -
루첸티오 : 그럴 리 있나, 그녀 얼굴의 향긋한 아름다움이여, 마치 에지노어의 딸 유러퍼 같다.
- 같은 책 1막 1장, pp 43 -
트라니오 : 아름다운 레더의 딸 트로이의 헬렌 에겐 천 명의 청혼자가 있었다는데 , 어어쁜
비앵커에게 한 사람 더 늘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레미오 : 예, 그건 위대한 허큘리즈에게 맡기십시다. 날아가는 매를 손으로 잡으려는 거요.
- 같은 책 1막 2장, pp 56 -
페트루치오 : 인내심은 남편의 시련을 견뎌낸 그릿셀보다 뛰어나며, 정절은 로마의 루크리스도 어림없어요.
- 같은 책 2막 1장, pp 72~73 -
평소에 고대 신화나 역사에 관심이 있었다거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즐겨 읽으신 독자들은 쉽게 맞출 수 있을 것이라,,,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
미너바 여신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네(미네르바)
"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서야 그 날개를 편다 " 라는 헤겔이 남긴 명구만 알고 있어도 미너바 여신이 누군지 알 수 있다. 미네르바는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로마식 이름이다.
에지노어의 딸 유러퍼
티치아노 <에우로파의 강탈> 1562년
제우스는 해변에 혼자 놀고 있는 에우로파의 모습에 한 눈에 반하여
자신의 부인인 헤라 몰래 황소로 둔갑하여 에우로파를 납치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녀의 이름이 유럽(Europe)의 어원으로 알려져 있다.
에지노어가 누군지 몰라도 유러퍼는 유로파, 즉 에우로파(또는 에우로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지노어는 에우로파의 아버지이자 페니키아의 왕 아게노르를 가리킨다.
제우스는 해변에 혼자 놀고 있는 에우로파의 모습에 한 눈에 반하여 그녀에게 가까이 접근하고 싶었지만 올륌포스의 지배자인 제우스도 자신의 여성 편력을 시시각각 감시하고 질투하는 부인 헤라가 두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황소로 둔갑하여 에우로파를 강제로 납치하여 크레타 섬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제우스와의 사이에 에우로파는 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한 명이 크레타의 미궁과 관련있는 미노스 왕이다.
아름다운 레더의 딸 트로이의 헬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실본을 체사레 세스토가 모사 <레다와 백조>
트로이의 헬렌이라고 하면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고대 그리스 최고 미녀 헬레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헬렌은 영어식 이름이다.
헬레나의 어머니는 레다인데 아버지는,,. 제우스다.. (-_-;;)
레다를 좋아하게 된 제우스는 이번에는 백조로 변신하여 그녀에게 접근하였는데 이로 인해 레다는 백조의 알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그 깨어난 알들 중 하나가 바로 헬레네이다. (나머지 알에는 쌍둥이자리로 유명한 카스토르와 폴룩스가 깨어났다)
허큘리즈
허큘리즈는 신화 속 가장 힘이 세고 가장 유명항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영어식 이름이다.
로마의 루크리스
티치아노 <루크레티아의 겁탈> 1571년
루크레티아라고 불리기도 하는 루크리스는 로마의 장군 콜라티누스의 아내이다.
왕의 아들 타르퀴니우스 섹스투스와 그의 동료들은 자기 마누라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자기 아내의 정숙함에 확신을 가진 콜라티누스는 각자 로마로 돌아가 아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고 오자고 제안했다. 이 때의 로마는 남녀불문하고 매우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는데 다른 사람들의 부인들은 하나같이 주연을 베풀며 흥청거리고 있는 반면, 남편을 위해 어깨걸이를 만들고
있던 루크레티아를 보고 그 정숙함과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타르퀴니우스 섹스투스는 루크레티아의 근면성실함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외모에도 마음을 빼앗겼고 질투심과 애증과 욕망에 불타 그녀의 남편이 전장에 돌아간 사이에 루크레티아한테 찾아가 몸을 주지 않으면 하인을 벤 후 자신이 간통현장을 목격한후 하인을 죽인거라고 떠벌릴꺼라고 협박하여 겁탈을 하였다.
정숙했던 루크레티아는 타르퀴니우스에게 겁탈당한후, 불명예를 참지못해 아버지, 남편, 남편의 친구 브루투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은 후 복수를 부탁하고는 자결을 택한다.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브루투스는 광장에 시민을 모아놓고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해주자 예전부터 왕위찬탈 때문에 여론이 좋지 않았고 독립의 염원에 불타있던 로마의 젊은이들의 가슴에 기름을 붇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에는 루크레티아의 자결이 왕정에 대한 로마 민중 봉기를 일으킨 도화선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 왕정은 무너지게 되었고 이 때부터 로마 공화정이 성립된다.
그 이후로 루크레티아는 정절의 상징으로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번역가이자 고대 그리스 신화 전문가로 활동했던 故 이윤기 씨의 <그리스 로마 신화> 2권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무지한 번역가의 엉터리 셰익스피어 번역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져 있다. (제10장 ' <로미오와 줄리엣>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면 ' 참조)
이윤기 씨는 역자의 실명이 밝히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번역본을 인용하여 신화와 관련된 지식을 토대로 엉터리 번역의 수준을 지적하고 있다.
영화 <트로이>를 재미있게 본 사랑은 ' 트로이의 헬렌 ' 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 헬레나 ' 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으며 헬레나의 존재로 인해서 발생한 트로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제대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윤기 씨는 이를 문화적 ' 압축 파일 ' 풀리기의 경험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인물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 전개되고 있는 사건 정황을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들이 인용, 비유하여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 로마 신화가 생소한 독자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게 된다면...?
문화적 압축 파일 풀기가 이루어지지 않아 극중 인물의 대사를 통해 전달되는 정서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뿐더러 도리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어렵게 읽게 되는 역효과를 부를 수 있다.
작품 문장에 대한 상세한 각주와 주석이 있다면 독자는 이를 통해서 작품의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간혹 어떤 책은 각주와 주석이 빠졌다거나 아예 실려 있지 않은 것도 있다.
지금 내가 읽었던 1990년 초판 전예원에서 나온 <말괄량이 길들이기>에는 부록으로 작품 해설만 실려 있을 뿐, 내가 지적한 문장에 대한 상세한 각주가 없다. 아마도 전예원에서 나온 다른 셰익스피어 진접에서도 이런 형식으로 출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을 통해서 단순히 신정옥 교수의 번역의 문제점을 부각해서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 10년이 지난 지금도 판매되고 있는 전예원 셰익스피어 전집이 10년 전의 내용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면 문제가 있다.
번역은 원전의 본래 의미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대의 감각과 취향에 맞추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허큘리스가 20년 전에 사용했을지 몰라도 오늘날 허큘리스보다는 헤라클레스로 기억하고 있는 현대 독자들에게는 허큘리스라는 인물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오늘 K 문고 매장에 직접 들러서 현재 판매되고 있는 2006년에 발행된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예정이다.
그저 최신판이나 다름없는 이 책이 내가 읽었던 12년 전의 내용 그대로 유지되어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에 번역 내용이 개정되어 있지 않다면 이것은 번역자와 출판사, 공동의 책임이 있다.
신정옥 교수는 셰익스피어 전집 관련 머리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한 작품의 번역이 끝나고 그 다음 작품에 손을 댈 때마다 ' 잘못 씌어진 책은 실수이나 좋은 책의 오역은 죄악이다 ' 라는 명구가 나를 긴장시키곤 했다.
- <말괄량이 길들이기>(1990년 초판) ' 셰익스피어 전집을 옮기고 나서 ' -
오역 그리고 출판사나 편집 과정 중에서 발생한 오자 실수는 독자들에게 작품 이해의 방향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거나 혹은 잘못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이를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묵인한 채 버젓이 팔고 있다면 셰익스피어를 읽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크나큰 죄악으로 범해질 수 있다는 것을 역자와 출판사는 명심해야 한다.
P.S > Help me!!
<말괄량이 길들이기> 속 대사 중에 ' 인내심은 남편의 시련을 견뎌낸 그릿셀보다 뛰어나며 ' 에서 그릿셀이 어떤 인물을 가리키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혹시 ' 그릿셀 ' 에 대해 아시는 분이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 참고도서
* 루크레티아의 자결로 인한 로마 왕정의 붕괴에 대한 설명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권에 소개되어져 있다.
그리고 최근에 전예원에서 셰익스피어의 시집 <루크리스의 능욕>이 초역되었는데
루크레티아의 자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