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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인문학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엄기호 지음 / 낮은산 / 2009년 5월
평점 :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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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대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켜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 장정일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결 수 있다면-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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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라디오는 기계에 달린 단추를 눌러 작동되고, 전파를 통해서 우리에게 방송을 들려 주는 물건이다. 그래서 단추를 누르지 않으면 라디오는 그냥 기계 덩어리일뿐이다. 이 시 속의 화자는 자산이 라디오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군가가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주기를 바란다. 버튼을 누르면 자신도 그 누군가에게로 가는 전파가 될 수 있다. 시에서 말하는 전파는 화자와 그 누군가 간에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뜻한다. 서로의 단추를 눌러 주면 서로가 서로에게 전파가 되어 사랑으로 변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라디오는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켜는 기계이다.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라디오를 켜는 것이고, 음악을 듣고 싶지 않으면 라디오를 끈다. 즉 사람들의 편의나 실용성에 의해 라디오는 작동되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의 사랑이 라디오와 같은 것이라면 그 사랑은 편의적이다. 결국, 편의적 사랑은 오래 갈 수 없으며 그저 가볍게만 여기는 사랑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현대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등장
이 시는 장정일의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이 발표된 시기는 1988년이다. 1988년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잊지 못할 해이다. 서울 올림픽의 개최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해에는 좋은 기억도 있지만, 안 좋은 기억도 있기 마련이다. 1987년에 발생한 KAL 폭파 사건의 범인으로 북한의 대남공작원 김현희가 매스컴에 알려지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국제적인 행사 이후 한국은 반세기만에 급격한 경제 성장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제 한국은 전쟁 때문에 가난한 국가가 아닌 세계적 경제 중심지의 아시아 국가였다. 그리고 서구의 문화들이 유입하기 시작되었으며 그 유입 뒤에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있었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시장 개입이 아닌 시장의 기능을 자유화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 기업의 민영화에 의의를 두고 있다. 그리고 시장개방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 예가 바로 '세계화' 이다.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는 1993년에 우루과이 라운드에 타결 합의하였으며 그 후로 세계무역기구(WTO)가 등장하였다. WTO 설립은 산업과 무역 간의 장벽을 무너뜨렸으나 세계의 모든 나라가 무한경쟁 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보다 많은 자본을 창출하고 얻기 위해서 금융업, 부동산업의 강세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는데 지금도 우리나라 사회에 강조되고 있는 '재테크' 도 그 강세가 만들어낸 우리나라 특유의 신드롬이다. 사람들은 돈을 단순히 저축하고 모으기보다는 돈으로 이보다 더 많은 돈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요즘 세상에 주식이나 펀드, 그리고 땅 투자를 외면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축으로만으로 1억을 모을 수 없고, 자신만의 집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사로잡힌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프리카리어트
이렇다보니, 신자유주의 사회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불황과 실업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빈부격차는 계속 벌어져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한경쟁 시스템 속에서 나 한 몸 잘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짓밝고 불법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쟁 체제 속에 살아남은 자만이 어마어마한 자본들을 손에 쥘 수 있는 승자가 되었다. 무조건 이기는 자만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IMF 한파 이후 무너져버린 중산층들은 오직 잘 살아야한다는 신념 하나로 발버둥을 처야만 했다. 그러나 발버둥을 쳐봐도 가난한 생활은 이어졌다. 자신들의 노동력을 받아주는 직장은 없었고, 그나마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 주는 쥐꼬리만한 보수만으로 삶을 연명하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행복하고 안정된 삶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 머리속에는 자신의 직업이 언제 짤리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이 가난한 삶이 이어진다는 불투명한 미래를 생각하면서 고달픈 노동으로 하루를 보낸다.
'잃어버린 10년' 이후로 경제 불황에 허덕이고 있는 일본과 같은 경우에는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자못 심각하다. 우리들이 많이 알고 있는 '워킹푸어'(Working Poor)는 일본 사회의 병리적 문제가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이는 일하는 빈곤층을 가리키고 있다. 일을 해도 가난하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프리카리어트'(Precariate)라는 신조어도 만들어졌는데 '불안정한' 이라는 뜻의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e)를 합성한 것이다. 미래가 없는 불안정한 삶을 사는 비정규직 노동자 계급을 뜻한다.
프리카리어트의 등장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직 이 단어가 우리나라에는 통용되지 않았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프리카리어트는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프리카리어트는 아르바이트에 의존하려는 88만원 세대 그리고 정규직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신자유주의 인류의 사랑
'무한경쟁' , '승자독식사회' 가 주를 이루고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는 '아무도 안 믿는 세상' 이 되어 간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을 부추기고, 이에 따라 사람들은 자본을 얻기 위해서 상대방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인간 사이의 친밀감, 연대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르바이트와 취업 준비에 혈안이 된 88만원 세대들에게는 사랑과 연애는 사치일 뿐이다. 자신이 경제적인 자립이 안 되어있는 이상, 이들에게는 결혼이라는 것도 꿈도 꿀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오죽했으면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이 10대들의 섹스를 '슬픈 섹스' 라고 표현하였다. 이들에게는 그나마 이성 간의 사랑을 해갈해줄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는 동거뿐이다. 하지만 동거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는 사랑의 방식이다. 동거를 한다해도 부부로 연결되는 커플은 드물다. 이 시대에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은 88만원 세대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여성들 대다수는 결혼보다는 싱글을 택하고 있다.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서 혼자서 편안한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병든 사회에서 경제적 자립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이다.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이다. 치열한 경쟁다툼 속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여성들은 고액 연봉의 직장에서 일하는, 앞으로의 삶이 보장되는 신랑감을 찾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사랑의 감정으로 만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오직 '돈' 을 가져야한다는 감정으로 이성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장정일의 시가 신자유주의 사회에 지배당한 사회를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서울 올림픽 이후로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우리 사회에도 불기 시작하면서 이 시 속 내용처럼 '아무도 안 믿는 세상' 으로 변하고 있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인간들은 누군가 자신의 버튼을 눌러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버튼이 눌러짐과 동시에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전파는 사랑이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살기 바쁜 마당에 무일푼이며 보잘것없는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럴수록 그는 사회 속에서 소외되어 간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으며 사랑을 가볍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나마 새 것처럼 보이던 라디오에 사랑의 버튼을 눌렀다가, 점차 헌 것으로 변하게 되면 버튼을 끄고 헌신짝처럼 버리게 된다. '돈' 으로 사람을 만났다가, '돈' 이 궁하면 쉽게 헤어지는 요즘 사람들처럼 말이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단순히 책 제목이라고 보기에는 우리 사회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어서 무시무시하기도 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남 관심 가져줄 여유가 없다. 일을 해야만 앞으로 남은 일생을 살아갈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는 이제 시대의 화석이 되었다. 지금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가 대세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인류에게는 상대방의 매력에 이끌려 정열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사랑은 이제 없는 것일까? 88만원 세대로 살아가고 있는 나로써 이 책을 읽고 세상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더욱 더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