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의 시간 - 강만길 자서전, 2010년 제25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강만길 지음 / 창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노병(老兵)과 한 대의 트럭

다음은 6.25 전쟁에 관한 신문의 특집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이 씨는 올해의 나이로는 78세다. 그에게는 특별한 동생이 있다.
동생은 바로 이 씨의 트럭. 트럭은 이 씨의 인생 절반과 함께 동고동락을 해왔다.
이들의 각별한 운명은 6.25 전쟁 때부터 시작되었다. 17세의 이 씨는 트럭을 몰고다니며
강원도 영월의 광업소에서 일을 하다가, 느닷없이 발생한 6.25 전쟁에
이 씨와 트럭은 함께 징용되었다. 어린 나이 때문에 부대에서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트럭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마음으로 장교에게 사정한 끝에
학도병 자격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본인은 우리나라 1호 학도병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에 증명하는 공식 기록이 없다.
그 뒤로 그는 트럭과 함께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제대를 원하였으나 당시 부대에는 운전병이 귀한 터라  

국방부 수송부에서 5년을 일했다.
그리고 1958년에 다시 그에게 영장이 날아왔다. 6.25 전쟁 학도병에다가
국방부 수송부의 경력까지 댔으나 증명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다시 입대하게 되어
1962년에 제대했다. 이 씨의 군 생활 합계 12년.  

그러나 그에게 주어지는 연금은 월 9만원뿐이다.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쳤지만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트럭이라는 소중한 동생을 얻었다.  

그리고 이 씨는 지금까지도 트럭을 닦고, 기름칠하고 있다.
언젠가는 트럭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아픈 과거의 역사가 관심을 받는 그 날을 위해서..... 

 
 

 어느 노(老) 학자와 한 권의 자서전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의 <역사가의 시간>을 읽는 와중에  

신문 속의 이 씨에 관한 내용을 보게 되었다.
우연하게도 이 씨의 연세와 강만길 명예교수의 나이도 한 살 차이 밖에 안 나고,
이 두 사람은 험난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 속에 살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 씨가 트럭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리려고 하듯이
강 교수도 자신의 자서전을 통하여 자신이 겪었던 역사 속의 경험들을 알려주고 있다.
자서전이라고 해서 역사가 특유의 딱딱한 서술이 없어서  

술술 읽혀나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일제 강점기 말, 8.15 광복 후의 불안정한 국내, 6.25 전쟁, 4.19 혁명,
5.16 쿠데타, 유신 정권, 전두환 정권, 6.15 남북공동선언까지
우리나라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풀어가며   

살아오면서 느꼈던 역사의 감상(感想)을 말하고,
역사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그야말로 역사책이라고 불러도 어색한 점이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책 분량이 많은 만큼 내용 면에도
자신의 생애 위주로 풀어나가는 명사(名師)들의 자서전보다는
더욱 더 깊이가 있으면서도 무언가 엄숙하다.
강 교수가 겪었던 우리나라의 역사는 어두웠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최대한 주관적인 감정들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는 자신의 일생과 역사적 사건들을 담담히 표현하고 있다. 
 

 

 

 역사 앞의 인간도 변하고 만다

<역사가의 시간>들을 읽어보면 강 교수가  

지금까지 만나고 지내왔던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부분 인물들은 역사 앞에서 두 가지 극명한 갈림길에서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결정하게 된다.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변절을 해서라도 살아남아 기득권 행사를 한다거나,
이들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받거나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희생당하는 자들이다.
강 교수의 전작인 <역사는 변하고 만다>의 제목처럼  

역사 앞에 선 인간들도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새 나라의 첫 이승만 정권의 정치핵심과 행정요원은 전혀 재교육되지 않은
 일제강점기의 세력이 그대로 눌러앉았고..... 김종원 등 일본군대의 지원병 출신이  

  가당찮게도 백두산 호랑이로 변신해서 ‘포효’하거나, 김창용 등 일본군대의  헌병  

 하사관 출신이 ‘염라대왕’이 되어 숙군이라는 ‘요술방망이’를 휘두르는 주인이 되고  

 말았다..... 장준하 등과 같이 일본의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목숨을 걸고 광복진영으로  

 탈출했던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현실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역사가의 시간> p 93 중에서 -  

 

강 교수의 평을 통해서 내가 느꼈던 것은   
역사에 의해서 변한 인물들에 대해서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게 되면
오히려 희생당한 인물들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고,
자손대대로 왜곡되고 편향된 역사로 공부하게 된다는 점이다.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기록들은 그 때의 사건들을 알 수 있는
하나하나 중요한 사료(史料)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기록만으로 역사를 이해한다고해서 우리나라 역사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시험에서 몇 문제 더 맞추기 위해서 역사를 달달 외우듯이
단순히 기록으로 남아있는 역사적 사건 자체에 매달리면  

올바른 역사적 인식을 가질 수 없다.
역사 기록들은 대부분 가진 자들(지배층, 기득권자)의 관점이다.
그래서 다분히 주관적이면서도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역사는 가진 자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못 가진 자들. 즉, 억압받던 소수층과
가진 자들에 의해서 말살당한, 역사와 이름이 없는 자들의 입장으로도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역사적 사건들의 변화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변하게 된 인물들의 행적과 내면을 파악하게 됨으로써  

과거사에 대해서  올바르고 균형 있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강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알려지고 있는 잘못된 역사가 

땅 속 깊숙히 박힌 뿌리처럼 대중들의 인식에 박혀 있다.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이라는 사설을 발표하여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던
언론인 장지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구실을 한 <매일신보>에 친일 경향의 시와 사설을 발표했다는
연구가 주장되면서 그의 친일 행적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하는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을 수록하여 논란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장지연의 후손들은 친일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결국, 다음 해 반민규명위원회에서는 장지연을 친일명단에서 제외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역사적 사건에만 치중한 고정적 역사 관점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말해주고 있다.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쓴 활동 하나만으로 장지연은 독립운동가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친일 행적이 알려져 역사의 진실과 숨겨진 이면들을 밝혀졌다.
하지만 더욱 더 염려가 되는 것은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인식이다.
젊은 세대를 포함해서 대한민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장지연이라고 하면 독립 운동가라고 생각이 깊게 인식되어져 있다.
학생들이 배우는 국사 교과서에는 장지연을 독립 운동가로 기재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적에 관한 언급은 단 한 줄도 없다.
우리의 두뇌는 생체적으로 변화라는 것에 대해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래서 한 번 머릿속에 자리 잡은 고정된 인식은 바꾸기가 쉽지가 않다.
장지연 친일사전 수록 논란 이후에
장지연이 친일 행적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만약 장지연이 친일 행적을 했다고 말하면 대부분 교육 받았던 사람들은
이 주장에 믿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오용(誤用)당하는 우리 역사

친일사전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한 장지연 후손뿐만 아니라
광복 후 강제 몰수당한 친일파 조상의 땅을 법으로 되찾으려는 후손들이 보여주듯이
특정인의 역사를 통해 조상에 의해서 대대로 누려왔던 명예를 지키거나  

되찾으려고 하는 것은  조상뿐만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가문에 대해  

구차한 모습만 보일 뿐이다.
그것은 잘못된 역사 인식이며 우리나라 역사를 배워야하는 의미도 없게 된다.
이 책에서도 그런 유사한 내용의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하루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학교 연구실로 찾아와서.....  

  우리 현대사를 전공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생물학 석사가  

  왜 국사학 박사를 하려느냐고 물었더니.....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군대 내 좌익 숙청에 명성을 떨치다가 군인들에 의해 암살된 김창룡이  

  그의 아버지인데, 암살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우리 현대사를 전공하려 한다는 것이다..... 모든 학문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역사학이란 어느 특정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전공하는 학문이  

  아니라 하고 타일러 보낸 일이 있었다. 

                                                               - <역사가의 시간> p 92 중에서 -  

  

 

지금도 학계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역사가들의 연구뿐만 아니라 독립 운동가의 후손들도  

잃어버린 조상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연구 활동을 한다거나  

여러 단체들을 통해 자비로 홍보를 펼치고 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굳이 남는 시간에 역사학 공부에 쏟아 붓고,
전국 곳곳에 홍보를 펼치면서까지 조상들의 명예 찾는 일에 매달려야하는지
후손들은 스스로 생각해봐야 한다.
단순히 조상의 명예를 되찾아서 역사의 숨겨진 진실을 공개하여  

올바른 역사 정립에 기여하려는지
아니면 조상 덕으로 자신의 명예를 얻어서 영달(榮達)을 얻으려고 하는 것인지
그 활동의 의도가 올바르며 명확해야 한다.
만약 후자의 의도로 조상 명예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면
훌륭한 공적이 있으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조상들을 욕보이는 짓이며
오히려 정작 받아야 할 진정한 역사적 평가를 후손들의 욕심으로 인해서  

영영 받지 못하게 된다. 
 

 

 

 젊은 세대들을 위한 역사책

이 씨에 관한 기사 옆에는 변화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전쟁 인식에 관한 기사가 소개되어 있다.
대학생들이 직접 전쟁이 벌어졌던 전쟁터나 전쟁 박물관에 찾아가서
6.25 전쟁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확립하게 된다는 기사 내용이다.
6.25 전쟁에 관심을 가질 것을 트럭 앞에서 힘껏 역설(力說)하고 있는  

이 씨의 기사와 대조적이다.
대조적인 기사 배치 구조가 바로 우리나라의 모습이다.
백발이 성성하고 예전의 기력이 사라지고 없는 6.25 세대들은
자신들이 나라를 위해 바쳤던 일들을 자랑스러워하며
후손들에게 나라의 중요성과 애국심을 알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젊음의 힘이 왕성한 정보 통신 세대들은 관심이 없다.
내가 겪었던 일도 아니며 6.25 전쟁은 그냥 아주 오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6.25 전쟁이 몇 년에 일어나는지도 모르며
심지어 남한이 먼저 공격한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북한과 전쟁이 나면 도망가는 것이 장땡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조건 남한이 이긴다고 주장한다.  
하필이면 6.25 전쟁 발발 50주년 기념식의 다음날이  

우라나라 축구 대표 팀의 8강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경기가 펼쳐지게 되어 6.25 전쟁 발발 50주년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기념이 월드컵에 가려져 무색해졌다.

역사 관련 도서 판매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니 이 책이 상위권에 랭크되고 있다.
나는 이 책이 출간된 시기가 아주 좋았다고 생각된다.
6.25 전쟁 50주년을 맞추어 출간하게 되어
6.25 전쟁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해 큰 관심을 끌 수 있는 

시너지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아공 월드컵에 대한 관심의 열기 속에서도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그 중 6.25 전쟁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원로 역사가의 자서전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있다는 점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그만큼 예전보다 6.25 전쟁을 포함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졌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약간의 바람이 있다면
이 책을 사고 읽은 사람들 중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점이다.
단순히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저명한 원로 역사가의 자서전으로만 읽혀지기 보다는
역사가의 생애를 통해 왜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통일이 되지 않고
분단국가로 지내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읽어야 한다.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갈 세대이기에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   


인용 기사 출처 및 링크

[전쟁 세대, 젊은 세대 6.25를 말하다] 중앙일보 6월 26일자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270607 

 

[“박정희·장지연 친일명단 빼달라”] 경향신문 2009년 11월 3일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031804355&code=940100 

 

['친일사전' 속 박정희·장지연·안익태···친일행적 무엇이 담겼나]  

노컷뉴스 2009년 11월 9일 입력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309050 

 

[반민족 진상규명위 친일인사, 박정희·장지연·홍난파 '친일' 제외] 

한국일보 2009년 11월 27일자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911/h200911272203022195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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