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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냥이로 사회학 하기 - 혹은 나는 어떻게 고양이를 사랑하도록 배웠는가
권무순 지음 / 오월의봄 / 2026년 1월
평점 :

부모님의 집에 매일 놀러오는 고양이가 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왔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주1]


이름 없는 고양이는 제 방안을 거닐 듯 돌아다닌다.[주2] 한참 서성거리다가 문 앞에서 눕는다.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오면 밥을 달라고 야옹야옹 운다.

반년 동안 밥을 얻어먹었는데도 고양이는 어머니의 손길을 무서워한다.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고양이를 한 번도 쓰다듬지 못했다. 그런데 고양이가 착하다. 어머니가 자신을 만지려고 하면 발톱을 내밀지 않고, 하악질도 하지 않는다. 뒷걸음치면서 피하기만 한다. 어머니가 밥을 주면 가까이 다가와서 받아먹는다. 고양이는 어머니를 알아본다. 길을 가다가 어머니를 만나면 졸졸 따라다닌다. 정말 이상한 고양이다.[주3] 보면 볼수록 정말로 기묘(奇妙/奇猫)해.

이름 없는 고양이도 가족이 있다. 어떤 날은 거의 다 자란 새끼 고양이와 같이 밥 먹으러 온다. 맛있는 음식을 새끼에게 주고 먹지 못하니 그다지 살이 찌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대로 만족하면서 부모님 집에서 이름 없는 고양이로 살아갈 작정인가 보다.[주4]
무사태평해 보이는 저 고양이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에 고민거리가 있을 것이다.[주5] 인간과 함께 사는 집고양이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길고양이로 살아갈 것인가. 이름 없는 고양이는 인간에게 애교를 부리는 반려묘도, 인간을 극도로 경계하는 야생 고양이도 아니다. 이 기묘한 친구를 어떻게 봐야 할까?

《길냥이로 사회학 하기》는 고양이를 동물이 아닌 ‘행위를 하는 주체’로 다시 보게 만든다. 이 책의 저자는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을 연구했다. 과학기술학은 과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자연과 문화, 기술과 인간 등의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 두 가지 개념의 얽힌 관계와 연결망에 주목하는 학문이다. 행위를 하는 주체는 단독으로 행위를 하는 독립된 실체를 뜻하지 않는다. 또 다른 주체가 어떤 행위를 하는 데 영향을 주는 능동적 존재이다. 비인간도 행위를 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과거의 이분법은 인간과 비인간을 철저히 구분하는 인간중심주의를 답습했고, 과거의 사회학은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만 분석했다. 과학기술학은 이 두 가지 한계를 비판하여 비인간의 행위성(agency)에 주목한다. 비인간의 행위성은 다른 인간과 비인간의 행위를 변화시킨다.

과학기술학을 정립한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인간과 비인간 모두 ‘행위자(actor)’로 인식했고, 이 세계가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들이 얽힌 연결망(network)이 만든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복잡한 연결망을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이라고 한다.
ANT에 따르면 길고양이도 비인간 행위자다. 길고양이는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인간에게 접근해서 먹이를 구한다. 나의 어머니는 길 위에 떠도는 강아지를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았고, 고양이보다 개를 더 좋아한다. 시골에 정착하면 반려견을 키울 거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고양이 집사가 되었다. 이름 없는 고양이가 어머니의 인생 목표(행위 목표)를 수정하게 했다. 처음부터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거나 고양이를 길러본 적이 없는 인간이 주기적으로 길고양이에게 밥을 준다면 그 사람은 길고양이를 만나서 행위자가 된 것이다. 부모님의 집은 이름 없는 고양이의 맛집이자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다. 인간 행위자인 어머니와 비인간 행위자인 길고양이는 한집에서 살고 있다.

저자는 길고양이가 비인간 행위자라면, 그들을 우리와 협상하는 대상으로 인정해야 하며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길고양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행위를 한다. 인간은 길고양이의 행위성을 바라보면서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 더 나아가 길고양이들과 함께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길고양이를 정치적 주제로 보는 저자의 견해가 지나친 비약이라고 지적하는 독자들이 있다. 과학기술학이 낯선 독자들은 ‘정치하는 길고양이’가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저자는 인간과 비인간이 포함된 공동체를 뜻하는 ‘사물의 의회(parliament of things)’를 언급만 했는데, 이 생소한 개념이 나오게 된 배경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야 했다. ‘사물의 의회’는 라투르가 자신의 책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We have never been modern,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년)에 제시한 용어다.


이름 없는 고양이는 집 밖에서 생활하는 반려종(companion species) 또는 반려(하는 행위)자이다. ‘companion’은 ‘빵을 함께 먹는다’라는 뜻을 품은 라틴어 ‘쿰 파니스(cum pains)’에서 생긴 단어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동료로서 빵을 나누는 존재를 반려 종이라 했다. 반려종은 단순히 음식을 같이 먹을 수 있는 동료가 아니다. 서로 돌보고,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면서 관계를 맺는 동반자다. 이름 없는 고양이는 어머니의 자식이 아니다. 기묘한 친척(odd kin)이다. 해러웨이가 강조한 ‘친척’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없는 존재다. 이름 없는 고양이는 두 발로 걷는 친척에 관심이 많다. 인간 친척과 함께 사는 법을 잘 아는 묘수(妙手/猫手)다.
8월 8일 세계 고양이의 날을 맞아
이름 없는 고양이를 위해 글을 쓴
cyrus의 주석

[주1]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첫 문장을 패러디했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송태욱 옮김, 16쪽)

[주2, 3]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시 『고양이』 1연과 마지막 연의 구절을 인용했다. 오늘 8월 8일은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번역한 황현산 선생의 8주기다.
내 머릿속을, 강하고, 부드럽고, 매혹적인,
아름다운 고양이 한 마리가.
제 방안을 거닐 듯 돌아다닌다.
녀석이 야옹거려도 그 소리 겨우 들리고.
[중략]
너의 목소리밖에는, 신비로운 고양이.
세라핀 같은 고양이, 이상한 고양이야.
내 안에서는, 한 천사 안에서처럼
모든 것이 미묘하고 조화롭구나!
(황현산 옮김, 102~103쪽)
[주4, 5]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나온 문장들을 패러디했다.
* 36쪽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니 그다지 살이 찌지는 않았지만 절름발이도 되지 않고 그럭저럭 건강하게 그날그날을 살아가고 있다. [중략] 그런대로 만족하면서 평생 이 선생 집에서 이름 없는 고양이로 살아갈 생각이다.
* 612쪽
무사태평해 보이는 이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