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년 만에 쓴 영화 리뷰
영화관에 가면 우리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때문에 영화를 편하게 볼 수 없다. 방해꾼은 우리의 머리를 툭툭 건드린다. 이 귀찮은 녀석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아까 봤던 영화 장면 A, 절대로 잊지 마. 잘 생각해 보라고. 영화 장면 A는 분명 B를 의미할 거야. B는 잠깐 지나간 장면 C와 분명 연관이 있을 거야.”
방해꾼은 우리에게 자꾸 생각하라고 부추긴다. 생각이 많아지니까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피곤하다. 졸음이 쏟아진다. 꾸벅꾸벅 존다.
영화관에 출몰하는 방해꾼의 정체는 ‘해석자’다. 해석자는 책 속에도 살고 있으며 미술관에도 나타난다. 해석자는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 예술 작품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다. 관객은 해석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해석자의 유혹을 완강히 거부하지 못한다. 관객은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영화를 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관객은 이제야 바로 옆에 해석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관객은 해석자의 반응에 순순히 따른다. 영화를 해석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쳐서 영화에 흥미를 잃는다. 잘 만든 영화인데도 관객은 거부감을 느낀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Sergei Parajanov)의 <석류의 빛깔>(The Color of Pomegranates, 1969년)은 해석자들이 좋아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개봉되면 영화관 좌석에 관객보다 해석자들이 더 많이 앉아 있다. 해석자들이 너무 많으면 영화를 재미있게 본 관객은 줄어든다. 대부분 관객은 비몽사몽 중에 영화를 본다. 잠들어 버린 관객은 영화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인상 깊은 영화 장면 한 개도 건지지 못한다. 그들은 십중팔구 영화가 ‘수면제’라고 말한다. 해석자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해석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 허승철 《코카서스 3국 문학 산책: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대표 시와 러시아 문학》 (문예림, 2018년)
※ 사야트 노바의 시 두 편이 실려 있다.
<석류의 빛깔>의 원제는 ‘사야트 노바(Sayat-Nova)’다. 사야트 노바(1772~1795)는 아르메니아의 음유시인이다. 영화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가 태어난 곳은 현재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Tbilisi, 러시아식 지명은 티플리스)다. 그가 태어났을 때 트빌리시는 소련의 일부였다. 사야트 노바의 출신지도 트빌리시다. <석류의 빛깔>은 사야트 노바의 삶을 다룬 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대사가 거의 없다. 영화 속 인물들은 표정과 몸짓, 춤과 같은 시각 언어를 통해 사야트 노바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준다.

노바는 궁정 악사로 활동하다가 왕의 여동생을 사랑한 죄로 추방당했다. 마르마르(Marmar)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지만, 노바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실의에 빠진 노바는 하흐파트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승이 되었다. 1795년에 이란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했고, 이란 군은 아르메니아 포로들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한다. 개종을 거부한 노바는 이란 군에게 살해당했다. 노바는 수도사의 삶을 살면서도 세속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주제로 시를 썼다.
파라자노프는 악기를 연주하는 음유시인 노바의 모습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인생에 깊은 고뇌를 느끼는 수도승 노바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종교적 색깔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로 인해 <석류의 빛깔>은 소련 검열관의 무자비한 가위질을 피하지 못했고, 소련 정부의 탄압을 받은 파라자노프는 십 년 동안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영화의 매력은 종교적 상징을 표현한 중세의 이콘(icon, 성화)과 초현실주의적 예술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몽환적인 이미지의 조화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장면 뒤에 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의미가 숨어 있다. 영화는 관객의 해석을 유도한다. 하지만 영화를 해석하는 일은 수월하지 않다.
* 윌 곰퍼츠, 주은정 옮김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31가지 방식》 (RHK, 2025년)
관객이 <석류의 빛깔>을 스크린에 흐르는 예술 작품으로 바라본다면, 해석이 아닌 감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감상 행위는 영화를 생각하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해석자는 영화 장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감상자는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들을 채운다.

영국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자신만의 예술을 표현하려면 “이웃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당부한다. 호크니의 무심한 반응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에 적용할 수 있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는 사물을 정확히 보기 위해 ‘소거의 과정’을 거쳤다. 소거의 과정이란 사물의 핵심(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석류의 빛깔>을 감상할 때도 소거의 과정이 필요하다. 해석자와 비평가들은 사야트 노바의 삶을 상징하는 장면을 찾아서 영화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 동성애자인 파라자노프는 소련 정부의 동성애 탄압을 피하지 못했고, 동성애 혐의를 받아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해석자와 비평가들은 이 사실을 단서로 삼아 영화 속 동성애 코드로 보일 만한 장면을 찾는다. 하지만 감상자는 사야트 노바의 삶과 파라자노프의 영화 미학을 소거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되는 그들의 존재감을 모른 척하거나 말끔히 지워야 한다.

생각이 많아지는 영화 해석은 영화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한다. 사야트 노바와 파라자노프를 아는 해석자를 외면한 채 영화를 본다면 아르메니아 전통 악기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릴 것이다. 아니면 기쁨, 사랑, 슬픔 등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 아르메니아 민속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악기 연주가 좋았다거나 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면 영화를 제대로 감상했다고 볼 수 있다.
* 수전 손택, 홍한별 옮김 《해석에 반하여》 (윌북, 2025년)
* [절판] 수전 손택, 이민아 옮김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년)
예술을 해석하는 일에 반대한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우리 감상자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한다. 예술 작품에서 내용을 찾지 말 것, 그 대신 내용을 제거해서 예술 작품의 실체를 바라볼 것. 예술 작품과 영화를 잘 감상하려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느낄 줄 아는 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술을 사랑하는 태도, 손택이 강조한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다.

영화의 본질은 영화감독의 마음속에만 있는 건 아니다. 영화의 매력은 영화를 해석하고 비평하는 사람들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영화의 본질과 매력은 끝이 없으며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관객인 우리의 마음속에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