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해적단

원작류드밀라 라쥬몹스까야

윤색, 연출: 이성재


2025년 3월 14일 금요일 저녁 8시 

골목실험극장







우리는 도덕을 저격해야 한다.” 매우 과격해 보이는 이 말을 한 사람은 과연 누굴까? 도덕을 깨부순 철학자 니체(Nietzsche). 문제의 발언은 그의 저서 우상의 황혼》(박찬국 역, 23쪽)에 나온다. 도덕만 보면 정신이 사나워지는 철학자에게 바싹 다가서기 쉽지 않다. 사실 니체는 도덕을 증오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악을 부추기는 교사(敎師)도 아니다. 니체가 저격하려는 것은 우리 삶을 구속하는 도덕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우상의 황혼(아카넷, 2015)





정신에 도덕이 달라붙은 사람은 늘 착하게 살려고 한다. 착한 사람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자책한다. 이때 도덕은 채찍으로 변한다. 도덕의 매질이 계속되는 동안 착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반성의 문신을 새긴다. ‘착하게 살자.’ 니체는 도덕에 복종하는 착한 사람을 노예로 비유한다니체가 보기에 도덕의 노예는 스스로 학대하는 병든 인간이다.













러시아의 극작가 류드밀라 라쥬몹스까야(Ljudmila Razumovskaya, 1946~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을 니체의 철학 조명에 비추어 보자. 그러면 커다란 질문 하나가 무대 위에 나타난다. 도덕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삶은 과연 행복한가?


희곡은 1981년에 발표되었다주인공인 소련의 수학 교사 엘레나(전소영 분)는 착한 사람이다. 그녀는 도덕으로 만들어진 집에 혼자 산다. 그녀의 생일에 졸업을 앞둔 네 명의 제자가 불쑥 도덕의 집에 찾아온다. 제자들은 생일 파티를 준비해 엘레나를 즐겁게 해준다. 축제와 같은 분위기에 취한 엘레나. 제자들은 정신이 말랑해진 엘레나에게 어두운 본심을 드러낸다



엘레나 선생님, 잠깐만 열쇠를 빌려주시면 안 돼요?”



엘레나의 집에 있는 금고가 있다. 그 안에 제자들이 제출한 수학 시험 답안지가 있다. 수학 시험을 망친 제자들은 수학 시험 답안지를 수정하고 싶어 한다. 그러려면 금고를 열 수 있는 열쇠가 있어야 한다. 제자들은 이 열쇠 하나를 얻으려고 엘레나의 집에 온 것이다이제야 정신을 차린 엘레나는 나쁜 일을 저지르려는 제자들을 만류한다. 그녀는 도덕을 배반하면서 살게 되면 삶이 더 불행해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제자들의 반발심은 더 커진다성적이 좋으면 명문대에 입학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직업을 고르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 그래서 제자들은 가난한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


빠샤(남우희 분)는 만약 가난해지면 여자 친구인 랄랴(이연주 분)가 자신을 버릴 것으로 생각한다. 랄랴의 꿈은 돈 많은 여자가 되는 것이다. 유유상종이라고, 부유한 여성은 부유한 남성을 만나 결혼할 수 있다. 비쨔(남준우 분)은 세 명의 친구에 비해 집안 형편이 어렵다비쨔의 아버지는 가난 때문에 화가의 꿈을 접었다. 비쨔는 자신도 아버지처럼 꿈(농대에 진학해서 농장을 경영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가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는 수학 성적을 고쳐서 가난을 대물림받는 암울한 현실에 벗어나려고 한다.


발로쟈(강대현 분)가짜 생일 파티의 주동자다. 그의 목표는 열쇠도, 부유한 삶도 아니다. 발로쟈가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이다. 권력만 있으면 이 세상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발로쟈는 권력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게임 또는 스포츠로 인식한다. 발로쟈의 진짜 목표는 도덕의 집에 있는 엘레나를 부수는 것이다. 그가 도덕을 부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는 폭력이다열쇠를 얻지 못해 불안해진 제자들은 도덕으로 외롭게 방어하는 엘레나를 계속 압박한다. 발로쟈는 웃으면서 이 상황을 관전한다. 엘레나가 끝까지 버티자, 발로쟈는 최후의 수단으로 끔찍한 최악의 행동을 감행한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김예나 옮김 쓰촨의 착한 사람(지만지드라마, 2024)


* 한국브레히트학회 엮음 브레히트 선집: 희곡 3》 (연극과인간, 2015)

※ <사천의 선인수록





엘레나의 직업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先生)이지만, 현실을 제대로 부딪히면서 경험한 선생(先生, 인생의 스승)은 아니다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희곡 사천(四川, 쓰촨)의 선인(善人, 착한 사람) 센테라면, 엘레나는 소련의 착한 선생(善生)이다. 도덕적 정신이 점점 무너져가는 엘레나의 감정에 이입된 관객은 외롭게 싸우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낄 것이다. 엘레나를 영악하게 괴롭힌 발로쟈는 관객들의 욕받이가 된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그의 이름은 시발로쟈가 된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김기선 옮김 브레히트, 연극에 대한 글들(지만지드라마, 2020)




브레히트가 관객이 돼서 이 연극을 관람했다면극중 인물을 비판하는 감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브레히트가 지향하는 연극은 관객의 비판적인 관전을 허용한다. 관객의 비판적 관전은 연극의 작품성 또는 예술성을 따지는 태도가 아니다. 비판적인 관객은 눈으로 연극을 즐기는 동시에, 머리로 극장 밖의 현실을 인식하면서 그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따라서 비판적인 관객이라면 엘레나의 도덕성을 불신하는 제자들이 나쁘다거나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비판적인 관객은 도덕을 불신하게 만든 현실에 문제를 제기한다.


도덕의 집에서만 살아온 엘레나는 자본과 개인의 이기심이 긍정적으로 과대 포장된 천민자본주의 사회를 피부로 느끼지 못한 인물이다. 결국 그녀는 도덕의 집에 탈출하는 데 실패한다비루한 세상에 저항하는 힘이 완전히 상실된 도덕을 상징한다천민자본주의에 물든 하얀 인간성은 까맣게 변한다. 도덕은 인간성을 원래의 색으로 만드는 표백제가 아니다








엘레나는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도덕은 여전히 살아 있다. 안타깝게도 천민자본주의의 과도한 빛을 받으면 도덕은 죽는다. 그녀의 집에 있는 관 형태의 책상은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무대 소품이다. 천민자본주의의 습격(제자들의 방문)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도덕의 최후를 암시한다.


도덕의 힘이 미약하더라도 무능한 도덕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발로쟈와 같은 권력 중독자가 도덕을 폄훼하면서 파괴하기 시작하면 도미노 패가 우르르 쓰러지듯이 개인의 자유와 인간성도 파괴된다. 엘레나처럼 도덕이 우리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지나친 믿음 또한 경계해야 한다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관객들에게 어려운 숙제를 두 개나 내준다. 하나는 도덕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다른 하나는 도덕을 위협하는 세력에 저항하기도덕에 대해 생각해 볼 문제를 관객에게 주는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문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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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3-18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가락이 긴 청년이구만. 피아노를 쳤으면 잘 쳤을텐데... ㅋㅋ

cyrus 2025-03-18 22:01   좋아요 0 | URL
처음에 사진에 찍힌 저의 손가락 보고 말씀하신 줄 알았어요. 포스터에 그려진 검은 손가락 보고 말씀하신 거죠? ㅎㅎㅎ 제 손가락도 긴 편인 데다가 어렸을 때 피아노를 쳤었거든요. ^^

stella.K 2025-03-18 22:28   좋아요 1 | URL
맞아. 카드 들고있는 네 손가락. ㅎㅎ 근데 피아노를 치긴 쳤구나. 내 눈이 좀 예리하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