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가 - 배삼식 희곡
배삼식 지음 / 민음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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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여자는 꽃이다.” 옛날에 이 문장은 외모가 수려한 여자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을 꽃으로 비유한 찬사는 시들해졌다. 이 말 속에 여성의 참모습을 외모로 판단하는 시선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외모가 ’과 같은 말이 되는 순간 여성은 남성의 눈과 마음에 끼워 맞춰진 대상화(objectification)가 된다. 남성을 위해 꽃이 된 여성은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하지만 극작가 배삼식 <화전가>(花煎歌)를 희곡으로 읽고, 연극으로 보고 난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나는 빛바랜 찬사를 다시 쓰고 싶다<화전가>에 나오는 여인들은 꽃다운 인생을 살다 간 화녀(花女).







연극 <화전가>

극단 구리거울


2025221~22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연출] 

김미정



[출연진]

 

닭실 할매김 씨: 이경자

고모: 허세정

장림댁: 김정연

금실이: 석효진

박실이: 박나연

봉아: 이연주

영주댁: 이연진

독골 할매: 김미향

홍다리댁: 이혜정(극단 나무의자 소속)





<화전가>의 시간은 19504이다. 한반도 땅이 포탄을 맞고 두 개로 찢어 갈라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다닭실 할매김 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해 오랜만에 여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세 딸(금실이, 박실이, 봉아)두 며느리(장림댁, 영주댁), 고모 권 씨, 행랑어멈(나이 든 하녀) 독골 할매, 혈연은 아니지만 가족처럼 함께 지낸 홍다리댁여인들의 고향인 경북의 반촌(班村)에 따스한 봄의 기운이 돌아오지만, 매캐한 전운이 봄을 짓누른다마음이 미지근한 김 씨는 환갑 잔치가 달갑지 않다그러나 여인들은 화목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결국 김 씨는 자신을 위한 화연(花宴) 대신에 모두가 즐기는 화전(花煎)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여인들의 화전놀이가 시작되기 전날은 경신일(庚申日)이다. 이날 밤(庚申夜: 경신야)이 되면 잠을 자지 않고, 술을 마시면서 노는 풍습이 있다. 도교 신앙에 의하면 사람 몸에 기생하는 삼시(三尸)라는 벌레가 있다. 경신일은 삼시가 승천하는 날이다. 하늘에 올라간 삼시는 천제(天帝: 최고 신)에게 자신이 기생한 사람의 죄를 일러바치는데, 그 사람은 목숨을 잃는다. 경신일에 사람이 잠들면 삼시가 하늘에 올라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시의 승천을 막아 천수를 누리기 위해 경신야에 잠을 자지 않는다. 김 씨와 여인들은 소주 한 말을 함께 마시면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여인들은 각자 마음속에 뭉쳐진 여러 가지 감정들을 분출한다. 과거에 좋았던 시절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섭섭했던 순간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아홉 명의 여인 중 가장 젊은 피인 막내딸 봉아는 가족들이 잠을 못 자게 방해한다.



[봉아] 내가 몬 자게 할 기다.

[금실이] ?

[봉아] 언니 오래 살라꼬.

[금실이] 참 빌.

[봉아] 아무도 못 잔다, 오늘은. 자기만 해 바라. 가만 안 둘 기다.


(3경신야 2중에서, 92)

 


경신야에 잠을 청하는 일은 작은 죽음을 상징한다. 죽음은 인간의 수명뿐만 아니라 시간도 멈추게 한다살아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거나, 이런 행복한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진다. 봉아는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경신야와 화전놀이는 아홉 여인이 함께 경험한 화양연화(花樣年華). 아홉 여인의 화양연화는 순수하고 소박해서 아름답다. 여인들은 커피를 함께 마시고, 초콜릿을 조각조각으로 나누어 먹는다그리고 쓴맛이 강한 커피에 넣으려고 준비한 설탕 가루를 손바닥에 부어 맛보기도 한다행복한 순간은 물에 녹는 설탕 가루와 같다. 결국 행복한 순간은 흐르는 시간에 금방 녹아버리지만, 달콤한 여운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화전가>화녀전(花女傳)’이다아홉 명의 화녀는 어수선한 일상을 잠시 제쳐두고, 행복을 함께 공유한다. 혼자 피는 꽃보다 여러 송이의 꽃이 다 같이 활짝 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cyrus의 주석>







봉아는 극이 시작되자마자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소네트 15, 그것도 영어 원문으로 된 시를 고모 앞에서 읊으면서 등장한다. 극 중반부에 봉아는 잠에 취한 상태로 T. S. 엘리엇(T.S.Eliot)의 장시 <황무지>의 첫 구절을 영어로 낭송한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황동규 옮김, 황무지, 민음사)




국문학자 양주동(1903~1977) 선생은 1955<황무지>가 수록된 T. S. 엘리옽 시전집(탐구당)을 펴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대한민국에 출간된 모든 책이 보관되어 있다. 이곳 홈페이지에 T. S. 엘리옽 시전집의 서지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에 저장된 서지정보가 무조건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양주동 선생 이전에 우리말로 번역된 엘리엇의 시가 실린 문헌(단행본이 아닌 문학잡지)이 있을 수 있다.

 

화전가의 시간적 배경은 양주동 선생의  T. S. 엘리옽 시전집》이 나오지 않은 19504월 하순이다. 봉아는 우리나라에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황무지>를 영어로 읽을 줄 아는 똑똑한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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