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 전문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당신의 에르노」
2024년 9월 27일 금요일 저녁 8시, 수르채그
https://blog.aladin.co.kr/haesung/15817604
아니 에르노(Annie Ernaux)가 쓴 책들은 대체로 판형이 작고, 분량이 가볍다. 어떤 책은 100쪽이 안 될 정도로 얇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하루 만에 다 읽을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리지 마시라. 왜냐하면 에르노의 글은 만만치 않다. 작가의 성향을 알지 못한 채 에르노의 글을 읽으면, 중도에 책을 덮어버릴 수 있다.
* 아니 에르노, 신유진 옮김 《빈 옷장》 (1984Books, 2022년)
* 프랑수아 라블레, 유석호 옮김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문학과지성사, 2004년)
에르노는 글을 그악스럽게 쓰는 ‘가르강튀아(Gargantua)와 팡타그뤼엘(Pantagrue)’이다. 가르강튀아는 프랑수아 라블레(François Rabelais)의 소설에 나오는 거인국의 왕이다. 팡타그뤼엘은 가르강튀아의 아들이다. 이 거인 아버지와 아들은 고대 학자들의 책을 섭렵했고,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 똑똑한 대식가다. 글의 재료와 단어를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에르노는 그것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면서 글을 쓴다. 에르노의 거대한 머릿속으로 들어간 수많은 단어는 종이에 배출되어 에르노의 글이 된다.
에르노가 1974년에 발표한 첫 작품 《빈 옷장》은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드니즈 르쉬르(Denise Lesur)다. 그녀는 작가의 분신이다. 그래서 에르노의 글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대표작보다 첫 소설 《빈 옷장》을 먼저 읽는 것이 좋다. 이야기 곳곳에 항상 ‘나’로 시작되는 작가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화자의 목소리를 쭉 따라가다 보면 글 쓰는 작가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나를 매료시키는 그 단어들을 붙잡아 내게 두고, 내 글 속에 넣고 싶다. 나는 그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빈 옷장》 중에서, 90쪽)
에르노는 자신의 부모, 사랑한 남자들, 부모가 운영한 식료품 가게의 음식들, 더 나아가 자신을 매료시킨 모든 것을 집어삼키면서 글을 썼다. 에르노의 작품을 여러 권 읽었고, 이번 달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에르노 읽기 모임 「당신의 에르노」가 이루어지는 데 기여를 한 JH님은 아르노를 ‘담쟁이덩굴과 같은 여자’라고 했다.
* 아니 에르노, 최정수 옮김 《단순한 열정》 (문학동네, 2012년)
에르노의 대표작 《단순한 열정》은 작가의 불륜 경험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여자는 러시아 외교관인 연하의 유부남을 사랑한다. HJ님은 《단순한 열정》을 읽으면서 울었다고 했다. HJ님은 작가의 불륜을 옹호할 수 없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온통 한 남자만 끊임없이 생각할 정도로 사랑하는 작가의 감정 상태에 몰입했다고 말했다. 솔직하면서도 아주 세밀하게 글로 표현된 작가의 힘겨운 사랑이 슬펐다고 했다.
* 아니 에르노, 이재룡 옮김 《부끄러움》 (비채, 2019년)
HJ님은 《부끄러움》이라는 작품을 소개하면서 에르노를 ‘용기 있는 작가’라고 높이 평가했다. HJ님은 에르노가 인류학자와 같다고 했다. 에르노는 마치 인류학자처럼 자신을 관찰한다. 본인 안에 있는 가장 깊은 밑바닥 감정까지 들여다보고, 들춰내면서 글을 쓴다.
* 피에르 부르디외, 최종철 옮김 《구별 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새물결, 2005년, 전 2권)
에르노는 자신의 글이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영향을 받으면서 썼다고 했다. 그녀는 먹고, 마시고, 사람과 친분을 맺고, 사랑하고, 섹스하는, 이 모든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이 사회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글로 보여주려고 했다.
《빈 옷장》의 르쉬르는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놀이터나 다름없는 식료품 가게에서 자유를 만끽하지 못한다. 학교는 모든 학생을 통제하는 기관이다. 르쉬르의 눈앞에 식료품 가게에서 자주 먹던 음식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수업 도중에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오줌이 나오기 직전인데 화장실에 가려면 선생님에게 교실 밖으로 나가도 되는지 물어봐야 한다. 르쉬르에게 학교는 재미없는 감옥이다. 반면에 교사와 또래 친구들은 방종하게 행동하는 르쉬르가 저급하다고 느낀다. 르쉬르는 학교 안에 만난 낯선 타자들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 ‘구별 짓는’다. 구별 짓기는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동시에 타자와 타 집단으로부터 배제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다. 나와 타자를 구별 짓는 체험과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차별과 불평등이 생긴다.
* 아니 에르노, 김선희 옮김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열림원, 2021년)
이번 모임에 처음 참석한 구름님은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를 읽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화자(작가)의 어머니다. 화자는 치매에 걸려 요양병원에서 생활하는 어머니를 돌본다. 화자는 점점 늙고 병들어가는 어머니를 죽는 순간까지 지켜보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진솔하게 기록한다. 구름님은 이 책에서 만난 아르노가 ‘성실하게 글 쓰는 작가’로 느껴졌다고 했다.
* 아니 에르노, 조용희 옮김 《탐닉》 (문학동네, 2022년)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신유진 옮김 《남자의 자리》 (1984Books, 2024년)
* [구판 절판] 아니 에르노, 임호경 옮김 《남자의 자리》 (열린책들, 2012년)
에르노의 글은 느슨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글이 절대로 아니다. 조약돌님은 《탐닉》을 읽었을 때 너무 답답해서 힘들었다고 했다. 《탐닉》은 ‘S’라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이야기다. S는 《단순한 열정》에 나오는 남자의 동일 인물이다. 문수님(첫 모임 참석자)은 작가의 아버지를 묘사한 《남자의 자리》(문수님이 읽은 책은 2012년에 나온 열린책들 출판사의 책이었다. 1984Books 출판사에서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를 읽었는데, 역시 이야기에 몰입하기 쉽지 않았다고 했다.
「당신의 에르노」는 단순히 에르노를 읽는 모임이 아니라 여섯 명이 만나면서 느낀 에르노의 다양한 모습들을 하나로 포개어 놓으면서 ‘알아가는’ 모임이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에르노를 만날 의향이 있는가? 그녀의 글을 읽는 일은 무척 힘들다. 읽는 도중 지치거나 답답하면 책을 덮으면 된다. 다만 작가의 글쓰기가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저급하다는 식으로 비난하지 마시라. 글만 가지고 문학인지 아닌지 ‘구별 짓기’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절판] 수전 손택, 홍한별 옮김 《문학은 자유다: 수전 손택의 작가적 양심을 담은 유고 평론집》 (이후, 2007년)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에르노를 만날 의향이 있는가? 그녀의 글을 읽는 일은 무척 힘들다. 읽는 도중 지치거나 답답하면 책을 덮으면 된다. 다만 작가의 글쓰기가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저급하다고 비난하지 마시라. 글만 가지고 문학을 ‘구별 짓기’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양한 언어와 목소리, 감정들을 진실하게 담아야 할 문학을 ‘이것은 옳고 저것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구별 짓고 쪼개진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남는 건 보기 좋게 잘 꾸며진 텅 빈 문장 덩어리다. 비어 있는 문장 덩어리만 가득한 문학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미국의 평론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작가가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이 바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문학은 자유다》, 206쪽). 작가가 해야 할 일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아니 에르노는 50년 전부터 진실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지금도 한결같이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