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보면 희곡

멀리서 보면 연극


No. 6








<남일동 부인들>

극단 한울림

연출 정철원

작가 이지영(서채봉 역 외)


2024914일 오후 4시 공연 관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당신은 이 속담이 맞다고 동의하는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일을 했는데도 이름이 사라져 버린 위인이 많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무관심에 씻겨서 지워진 위인의 이름을 찾는 일에 매진한다. 하지만 위인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료(史料)가 남아 있지 못하면 영영 찾을 수 없다.

 

대구 중구에 국채보상운동 기념 공원이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에 시작된 항일 독립운동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로 국권이 완전히 빼앗긴 상태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힘없는 나라에 1300만 원의 빚을 갚으라고 강요하였다. 서상돈(1850~1913)김광제(1866~1920)는 나랏빚을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서상돈은 2천만 명의 동포가 술과 담배를 끊는다면 한 사람당 20전을 모을 수 있으며 3개월 만에 국채를 갚을 수 있다고 건의했다.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국채보상운동에 나섰다. 대구에서 자란 일곱 명의 여성은 남일동 패물 폐지 부인회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었으며 비녀와 가락지를 내놓아 자금을 마련했다. 남일동 패물 폐지 부인회에 소속된 일곱 명의 여성은 기혼 여성으로만 알려졌을 뿐, 오랫동안 이름이 잊혔다











국채보상운동 기념 공원에 국채보상운동 여성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 남일동 패물 폐지 부인회가 직접 작성한 선언문과 일곱 명의 여성 회원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여성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남편 이름 처(, 아내) 정씨, 서씨, 김씨, 정씨, 최씨, 이씨, 배씨로 되어 있다.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지 108년이 된 2015년에 남일동 패물 폐지 부인회의 명단이 확인되었다.

 

정경주, 서채봉, 김달준, 정말경, 최실경, 이덕수. 하지만 한 명의 여성 이름은 여전히 찾지 못했다. 김수원 아내 배씨.

 









남일동 패물 폐지 부인회의 업적을 조명한 <남일동 부인들>김수원 아내 배 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연극이다. 무대 위에 되살아난 배씨는 배영순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연극의 시대적 배경은 을사늑약 이후이다.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1864~1921)은 을사늑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썼다. 대구 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로 부임한 친일파 박중양(1872~1959)일본 상인들이 대구에 활동할 수 있게 대구 읍성을 헐어버렸다. 연극은 우리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역사적 사실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남일동 부인들이 자주 만나면서 대화를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계산성당 근처 빨래터다. 대구의 유일한 빨래터다. 무대 위에 돌 형상의 소품들이 놓여 있는데, 빨래터를 재현한 것이다.

 

역사는 이름 없는 위인에게 주목하지 않는다. 굵직굵직한 사건이나 남성에 초점을 맞춘 역사는 여성들의 일과 목소리를 배제한. 이제는 남성 중심의 역사에 가려진 여성 위인들이 많이 발굴되면서 주목받고 있지만, 여전히 역사 속 여성은 주변인이다. <남일동 부인들>은 극 중간에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사늑약, 서상돈, 장지연, 대구 읍성 철거 사건)을 언급하면서도 온전히 기록되지 못한 일제 강점기 여성들의 일상사(日常史)를 인물 간 대화와 노래로 표현한다. 배영순(김정현 분)은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금을 모은다. 남일동 부인들을 포함한 아낙네들은 빨래터에 모여서 가벼운 대화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논의한다. 그리고 기생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다. 연극은 산업과 농업에 종사하는 남성 중심 역사 그리고 신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압축된 고학력 지식인 중심의 여성사가 주목하지 못한 하층 계급 여성들의 삶과 노동을 빛나게 해준다. <남일동 부인들>경성(서울) 출신 모던 걸로 알려진 신여성만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잘 만든 연극에 아이러니한 그림자가 무대 위에 잠깐 지나갔다. 이 그림자의 정체는 장지연이다. 극 중 장지연(백광현 분, 극단 솥귀, <남일동 부인들조연출)은 통곡하듯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읊는다. 시일야방성대곡에 이날에 목 놓아 크게 우노라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아주 잠깐이지만, 백광현 배우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의미를 살려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표현했다. 그러나 장지연은 1914년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친일 논설을 여러 편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박중양(천정락 분, 극단 진창)과 함께 친일 인명사전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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