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카를 드릴까요, 아니면 포도주를 드릴까요?”

수잔나가 웃으며 물었다.

 

(안톤 체호프, <진창> 중에서, 사랑에 관하여37)




만약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술과 책을 파는 서점을 운영하는 주인이라면 처음 온 손님을 향해 방긋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걸었을 것이다.

 


보드카(vodka)를 드릴까요, 아니면 보드빌(vaudeville)을 드릴까요?”



보드카는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만들어지는 술이다. 보드빌은 술 이름이 아니다. 보드빌은 코믹한 연극 장르를 뜻한다. 소극(笑劇)과 비슷하다


체호프가 따라주는 보드카는 그의 중기 작품에 해당한다. 이때 작품 분위기는 대체로 어두운 편이다. 체호프의 중기 작품 속 인물들은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친다. 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 안톤 체호프, 하비에르 사빌라 그림, 이현우 옮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문학동네, 2016)

 

* 안톤 체호프, 오종우 옮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2009)

 

* 안톤 체호프, 안지영 옮김 사랑에 관하여: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대표 단편들(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체호프의 단편소설과 희곡을 즐겨 읽는 독자는 보드카에 익숙하다체호프가 직접 종이에 증류한 보드카는 스테디셀러다독자들이 즐겨 마시는 체호프의 보드카는 1898년산 중편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 안톤 체호프, 이영범 옮김 체호프 유머 단편집(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 오종우 체호프의 코미디와 진실(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5)




 

체호프의 보드빌은 젊은 시절 체호프가 쓴 코믹한 단편 소설, 그리고 체호프가 코미디 극작가로 인정받기 위해 쓴 극 작품들이다체호프는 죽기 전에 코믹한 희곡을 썼다. 하지만 연출가와 비평가들은 체호프가 쓴 코믹한 희곡을 단순하게 ‘드라마(drama)’로 이해했다. 체호프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불만을 표출했다. 아니, 내가 쓴 작품은 분명 코미디인데 극장 포스터와 신문 광고에서는 왜 자꾸만 ‘드라마라고 부르는가? 아마도 연출가들은 내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안톤 체호프김규종 옮김 체호프 희곡 전집》 (시공사, 2010)

 

안톤 체호프이주영 옮김 체호프 희곡 전집 1: 단막극》 (연극과인간, 2002)




이번 대구 소극장 페스티벌’ 참가작인 창작 집단 진창 <청혼 소동>체호프의 보드빌 <청혼>을 각색한 공연작이다원작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세 명이다.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늙은 지주, 아직 결혼하지 않은 지주의 딸, 그리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 소심한 지주. 










연극은 원작과 다르다. 연극 속 지주는 고인이고, 허영심이 강한 지주의 아내가 나온다. 소심한 지주는 몸이 허약한 총각이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결혼하고 싶어 한다. 그는 너무 소심해서 지주의 아내에게 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을 꺼내지 못한다. 다행히 지주의 아내는 소심한 지주와 딸의 결혼을 허락한다. 그런데 소심한 지주와 지주의 딸은 크게 다투는 관계가 돼버린다. 두 사람은 영지가 자신의 가문이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지 소유권을 둘러싼 두 사람의 분쟁에 지주의 아내까지 합세한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지주의 아내는 딸의 편을 든다. 하지만 딸은 소심한 지주가 자신에게 청혼하러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다. 그녀는 지주에게 화해하고,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소심한 지주와 딸은 아무것도 아닌 문제 때문에 또 한 번 싸운다. 이번에는 각자가 소유한 개가 얼마나 좋은 품종인지 서로 비교하면서 따진다. 두 남녀의 설전은 집안싸움으로 크게 번진다.


모녀와 소심한 지주를 연기한 배우들의 대사와 몸짓은 과장되어 있고 우스꽝스럽다. 그들은 대화 도중에 은어(隱語)와 비속어를 내뱉는다. 지주의 딸은 자신의 감정을 춤으로 표현한다. 체호프의 코미디가 생소한 관객은 웃음을 유발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가볍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관객이 있다면 체호프의 보드카맛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했듯이 <청혼 소동>보드빌이다. 체호프의 보드빌은 오로지 코믹한 상황을 보여준다. 보드빌은 거리에 공연되는 오락적 성격을 띤 소극이다. 민중의 입말은 배우들의 대사가 되고, 배우들은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른. 따라서 보드빌은 민중 친화적인 통속극이다. 실제로 체호프는 이런 보드빌을 쓰려고 했다. <청혼 소동>을 만든 연출자와 배우들은 체호프의 보드빌을 제대로 이해했다. 배우들의 코믹한 연기는 관객들을 웃게 했다.


체호프는 희곡과 소설을 쓸 때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희로애락을 관객과 독자가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려내려고 애썼다. 체호프에게 연극은 우리 삶의 진실을 묘사한 이야기다. 그의 보드빌은 희로애락이 농축되어 있다










<청혼 소동>인생의 희로애락과 (연출가) ‘천정락을 모두 담아낸 연극이다무대 한가운데에 죽은 지주의 얼굴이 나온 사진이 걸려 있다사진 속 얼굴의 정체는 연출가 천정락이다사진은 올해 1월 중순에 공연된 <진창>에 사용된 소품이다연출가 천정락은 <진창>에 열연했다. 천정락도 락()이다웃음을 좋아한다면 체호프가 따라주는 보드빌 한 잔, 맛보길 권한다.







Trivia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검은 옷을 입은 수도승 두 명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혹시 창작 집단 진창이 다음에 선보이게 될 공연작을 예고한 것일까? 












 




* 안톤 체호프, 석영중 옮김 지루한 이야기(창비, 2016)



체호프의 중편 소설 <검은 수사>(검은 옷의 수도사)는 연극으로 자주 각색되는 작품이다. <검은 수사>검은색보드카라고 할 수 있는,숨은 걸작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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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6-1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처럼 연극에도 숨은 그림, 단서를 심어 놓나봐요. ^^ 수도사 두 분이 예고편이라니 재미난 해석인데요

cyrus 2024-06-17 07:02   좋아요 1 | URL
연극이 시작되는 부분이 아무리 생각해도 <청혼 소동>에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고, 그 장면을 보자마자 검은 수도사가 먼저 생각났어요. 제 견해가 틀릴 수 있어요. 연극 도입부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궁금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