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루 GD 시리즈
티아구 호드리게스 지음, 신유진 옮김, Nyhavn 사진 / 알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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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희곡 가게 <인스크립트> 2024‘1월의 인스크립트추천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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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희끄무레하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다. 이와 반대로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유령이 있다. 이 유령의 이름은 엑토플라즘(ectoplasm)’이다. 이것은 유령이라기보다는 신비로운 물질에 가깝다. 엑토플라즘은 영매(靈媒)의 몸에서 나온다. 그것하얗고 끈끈한 액체로 되어 있다. 엑토플라즘이 흘러나오는 부위는 입, 콧구멍, 귓구멍이다밖으로 나온 엑토플라즘은 죽은 자의 모습으로 변한다사람들은 엑토플라즘이 영혼의 실체를 밝혀 줄 수 있는 물적 증거로 확신했다. 그들은 엑토플라즘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하지만 엑토플라즘을 찍은 사진 대부분은 조작되었거나 가짜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시간은 항상 뜨겁다. 시간은 식을 줄 모르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열기를 내뿜는 시간 앞에서 살아있는 존재는 맥을 못 춘다. 파릇파릇한 생명은 점점 누렇게 변하면서 사라진다. 기억은 정교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시간의 열기가 닿는 순간 기억은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르르 녹는다이처럼 시간은 모든 것을 태우고 파괴한다엑토플라즘이 가짜라고 해도 죽은 자를 잊지 못한 사람들은 죽은 자가 엑토플라즘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 영매는 시간에 태워져서 재로 남은 기억을 뭉쳐서 복원한다.


<소프루>는 무대 위에 열연(熱演)하는 배우들, 이 사람들의 뜨거운 연기 열정을 덥혀 주는 극장에 다시금 불을 지피는 희곡이다. 소프루(sopor)’는 포르투갈어로 을 뜻한다. 우리가 내쉬는 숨은 눈에 보이지 않고, 한순간에 사라진다.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배우는 무대 위에 오르기 전에 캐릭터(character)와 한 몸이 된다. 캐릭터가 된 배우는 숨 쉬듯이 연기한다. 종이에서 살고 있던 캐릭터는 무대에서 다시 태어난다배우는 온몸을 이용해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주고, 표정과 목소리로 캐릭터의 감정 상태를 표현한다. 관객은 배우들의 숨소리(연기)와 숨결(연기력)에 집중한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배우의 몸속에 캐릭터는 남아 있지 않다. 무대 위에서 숨이 되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극장에 배우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살아 있다. 하지만 관객은 그 사람을 볼 수 없다. 그 사람의 정체는 프롬프터(prompter)프롬프터는 무대 근처에 있다. 배우들이 열심히 숨 쉬는 무대 뒤쪽이나 아래쪽에. 프롬프터는 무대 근처에 숨어 있다. 배우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대사를 읊어준다. 캐릭터가 된 배우가 숨 쉬는 도중에 동작과 대사를 잊어버리면 캐릭터의 생명력이 끊긴다. 프롬프터는 배우를 위해 다음 동작과 대사를 알려준다. 그러므로 프롬프터는 배우와 캐릭터를 살리는, 아주 중요한 존재다.

 

<소프루>에 등장하는 예술감독은 프롬프터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예술감독은 프롬프터가 주인공인 연극을 만들고 싶어 한다.

 


 프롬프터, 당신을 말하고 싶어요. 프롬프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진짜 프롬프터인 당신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에게 대사를 알려주고 그들을 구조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사고를 다루는 이야기를 쓰는 거죠. 사고가 났을 때의 구조대원 이야기요. 나는 당신을 위한 연극을 쓸 거예요


(<소프루> 3, 12)

 


평생 숨어 있는 존재로 살아온 프롬프터는 예술감독의 제안을 거부한다. 프롬프터는 항상 시커먼 옷을 입는다. 보이지 않으려고 철저히 숨으면서 살아온 프롬프터는 화려한 조명 빛을 받아야 하는 무대 정중앙이 낯설다예술극장은 프롬프터를 극장의 호흡’, ‘극장의 기억’, ‘극장의 허파’(<소프루>, 19, 80)로 표현하면서 찬사를 보낸다. 프롬프터는 자신과 함께 일했던 배우들의 숨소리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나는 대사에 밑줄을 긋고 날짜를 적어뒀습니다. 늘 그렇게 해왔어요. 만약 누군가 극장의 기록 보관소에서 내가 프롬프터로 참여했던 모든 대본을 찾는다면, 내가 지금까지 일하는 동안에 속삭였던 모든 대사들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소프루> 20, 82)

 


<소프루>의 프롬프터는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들도 기억한다. 스태프는 배우가 숨 쉴 수 있는 무대를 만든다관객은 무대 위에 흘린 배우의 땀을 기억하지만, 무대를 만들다가 흘린 스태프의 피는 모른다. 그래서 프롬프터의 기억력은 소중하다.


프롬프터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직업이다. 그러나 프롬프터가 없으면 배우와 캐릭터의 숨소리도 영영 사라진다. 프롬프터는 뜨거운 시간 한가운데 뛰어들어 타버린 배우와 캐릭터 모두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소프루>는 프롬프터의 눈과 입에서 흘러나온 액터플라즘(actorplasm)’이다. 액터플라즘이 많을수록 좋다. 한 번 나오는 순간 금방 사라지는 배우의 숨소리를 다시 볼 수 있으니까.


아, 그런데 프롬프터가 진짜로 사라진다면 이 일은 누가 해주지? 극장을 찾는 관객이 하는 수밖에…‥




우리는 극장에서 모두 같은 공기를 마십니다.

 

배우, 스태프들, 인물들.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십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늘 같은 이야기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십니다.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숨을 쉬지만 그 공기는 같습니다.

 

나는 그들이 숨을 쉬는 것처럼 숨을 쉬어보려고 합니다.



(<소프루> 16, 57~59, 프롬프터의 대사)

 

 

관객도 배우와 함께 호흡하고, 같은 공기를 마신다. 관객인 나는 배우들이 숨 쉬는 것처럼 숨을 쉬어보려고 한다. 비록 정확하지 않더라도 나만의 액터플라즘을 만들 것이다. 





추신

 

* 소프루》에 <소프루><그녀가 죽는 방식>, 총 두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 ‘actor’남자 배우를 뜻한다. 여배우는 ‘actress’를 쓴다. 하지만 내가 만든 조어 액터플라즘(actorplasm)에 남배우/여배우로 명시되는 젠더 이분법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배우의 연기 활동을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되는 기준들, 즉 연령(성인 배우/아역 배우), 연기 비중(주연/조연/단역) 또한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액터플라즘의 액터배우를 통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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