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일로
나탈리 사로트 지음, 이광호.최성연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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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





말은 무기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이 책은 말 잘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자기계발서다. 이 책을 쓴 일본인 저자는 말을 잘하려면 자기 생각을 먼저 정리하라고 당부한다. 머릿속 생각이 뒤죽박죽 헝클어진 상태로 말하면 입 안에서 말이 배배 꼬인다. 상대방은 꼬여서 풀리지 않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생각 정리가 잘 된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정교한 무기가 되어야 할 말이 때론 무기력해질 수 있다. 상대방이 말귀(馬耳)’라면 신중한 생각 끝에 나온 말도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흘려듣는다말의 무게는 상당히 가벼워서 침소봉대(針小棒大)’가 되기 쉽다. 바늘 크기만 한 단어를 몽둥이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도 있다. 단어가 확 커져 버리면 의미도 확 달라져 버린다. 침소봉대된 단어는 대화를 방해하는 걸림돌이다. 대화가 원활히 이루어지려면 걸림돌을 빼내야 한다. 그런데 대화에 참여한 상대방이 침소봉대된 말에 지나치게 확신하면 문제의 돌을 빼내려고 하지 않는다. 말을 확대해석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에 반하는 상대방을 공격한다.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위험한 무기가 된다.


프랑스 작가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희곡 아무것도 아닌 일로무기력한 말이 대화하는 등장인물들을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만드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희곡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름이 없는 남자 1’남자 2’. 두 남자는 서로를 잇고 있는 관계를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기력하다극 중간에 남자 3’여자 1’이 나타나 두 사람의 대화에 참여한다. ‘남자 3’여자 1’은 꼬여버린 두 남자의 대화를 풀기 위해 중재자로 나서지만, 도움을 주지 못한다대화가 진행될수록 말다툼으로 변질되고, 공감의 폭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관계의 동아줄은 점점 얇아진다. 계속 늘어나는 두 사람의 무기력한 말은 관계의 동아줄 위에 널브러져 있다. 너저분한 말들은 튼튼했던 두 사람의 관계 동아줄을 한순간에 끊어버릴 힘을 지닌 위험한 무기가 된다. 희곡은 두 남자에게 이득이 없는 무의미한 언쟁만 계속 보여준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를 무대 위에 올린 연출가들은 원작을 충실히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해석에 맞춰 새롭게 변형시켰다. 원작에서는 말이 오고 가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어떤 연출가는 두 남자의 대화를 좀 더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퍼포먼스를 추가하기도 했다. 내가 만약 연출가라면 두 남자의 대화를 결투하는 상황으로 표현하고 싶다.







희곡 텍스트를 이미지로 재현하면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그림 곤봉 결투』(1820~1823년)와 흡사하다. 그림 속 두 남자는 상대방을 죽일 심정으로 곤봉을 휘두른다. 그런데 두 남자의 싸움터는 수렁이다. 두 남자의 눈에는 죽이고 싶은 상대방만 보일 뿐이다. 자신들이 수렁으로 빠지고 있는 위태로운 상황을 모르고 있다. 곤봉 결투이겨도 의미 없고, 서로의 몸과 정신을 소진하게 만드는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허구라고 볼 수 없는 비극이다. 가벼운 일상적인 대화가 어느 순간부터 상대방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결투 같은 언쟁으로 변하는 상황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연극 속 말다툼을 구경하는 우리 역시 언젠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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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2-15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이 인상깊네요. 맨 아래 고야의 그림은 처음 보는데, 보는 즉시 음, 고야풍이군..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고야 그림이네요~

고야 그림은 따로 그림책을 아직 구비하지 못했는데, 생각난 김에 고야 그림 도록을 갖춰놓아야 할 듯합니다..ㅎㅎ

cyrus 2023-12-18 06:37   좋아요 0 | URL
도록은 아니지만, 고야가 쓴 편지와 판화집이 실린 《고야, 영혼의 거울》을 권해드리고 싶어요. 이 책에 관한 제 글 몇 편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