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심연 - 깊은 바다에 숨겨진 생물들, 지구, 인간에 관하여
헬렌 스케일스 지음, 조은영 옮김 / 시공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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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점  ★★★★☆  A





 바다의 표면이 고요하다고 해서 깊은 곳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요슈타인 가아더, 소피의 세계: 소설로 읽는 철학(합본, 장영은 옮김, 현암사, 2015) 중에서, 448쪽 - 



인명사전을 펼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은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이다. 가가린은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한 구 소련의 우주인이다. 1961412일 가가린이 탄 우주선 보스토크 11시간 29분 만에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가가린은 눈동자 속으로 들어온 지구를 유심히 지켜봤다. 그는 평생 단 한 번으로 남게 될 지구와의 눈맞춤을 이렇게 술회했다.



 “우주는 매우 어두웠지만 지구는 푸르렀습니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거대한 지구는 가가린의 기억 속에 푹 박혔다1990년 미국이 쏘아 올린 우주선 보이저 1가 우주 한가운데서 유유히 움직이는 지구를 촬영했다. 그 사진을 본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은 검은색 종이에 살짝 찍어놓은 점처럼 보이는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불렀다.


우주는 지구 밖에만 있는 건 아니다. 지구는 아주 오래된 우주를 품고 있다. 지구가 품고 있는 이 우주는 보는 사람에 따라 푸르게 보일 수 있고, 어둡게 보일 수도 있다지구에 있는 검푸른 우주의 정체는 바로 심해다대부분 사람은 우주에 외계 생명체가 있다고 믿는다. 거대하면서도 텅 빈 우주에 인간 이외에 생명체가 살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바다 깊숙한 곳에 있는 우주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 특히 심해어의 생김새는 마치 외계 생명체를 연상케 할 정도로 독특하다. 간혹 심해어가 바다의 표면에 나타나서 인간의 손에 포획되거나 이미 죽은 상태로 해변에 발견되면 정체불명의 괴물로 오해하기 쉽다.


미국의 소설가 H. P.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공포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라고 말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을 보면 두려움을 느낀다. 우주와 심해는 우리에게 호기심과 공포라는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그렇지만 호기심이 공포를 억누르고 관심 어린 눈길을 천천히 넓히면 거대하고도 어두운 미지의 세계 속에 있는 눈부신 빛 한 줄기를 볼 수 있다눈부신 심연》은 검푸른색에 가려진 심해 속의 밝은 빛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심해 탐사선과 같은 책이다심해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지만,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심해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 책에 탑승하면 된다. 종이로 만든 심해 탐사선으로 심해를 탐험하면 심해의 엄청난 수압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의의 사고를 피할 수 있다. 


심해는 아주 고요한 검푸른색으로만 채워진 깊숙한 우주가 아니다. 눈부실 정도로 알록달록한 우주다. 심해 생물들은 발광 기관을 가지고 있다. 빛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 적응한 심해 생물은 반딧불이처럼 스스로 빛을 낸다. 그들의 몸에서 나는 빛은 청색과 녹색이 섞여 있다. 알록달록 빛나는 심해 생물들로 가득한 심해는 어둡지 않다. 그곳에 각양각색 빛나는 생명이 명확하게 보인다


심해는 최초의 생명체가 태어나고 자랐던 아주 오래된 요람이기도 하다. 세포는 모든 생명체의 시작점이다. 원시 세포는 엄청 뜨거운 물을 마구 뿜어대는 열수구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지금도 열수구 주변에 진귀한 심해 생물들이 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학명이 없는 미지의 생물들도 있다.


호기심이 공포심보다 많으면 심해는 더 이상 낯설고 두려운 우주로 보이지 않는다. 심해의 수심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심해에 처치 곤란한 쓰레기와 핵폐기물을 버리자고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구가 소중히 품고 있는 우주이자 지구 최초의 생명체가 태어난 뜨거운 요람에 쓰레기를 버리자고? 인간은 공룡과 곤충보다 늦게 나타난 동물인데도 이기적이다. 심해를 검푸른 광산으로 여기는 국가와 기업들은 철, , 아연, 코발트 같은 광물을 채굴하는 사업을 계획한다. 인간의 탐욕스러운 손길이 우주뿐만 아니라 심해까지 뻗을 기세다. 심해가 자원이 풍부한 광산으로 알려지면 심해 생물의 보금자리는 파괴된다. 집을 잃은 심해 생물은 살기 위해 해수면 위로 올라가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알록달록한 생명 다양성의 보고인 심해가 쓰레기장 혹은 광산이 되면 그곳은 빛나는 생명 한 점조차 볼 수 없는 침묵의 우주가 될 것이다.


생명을 키우는 요람이 된 심해는 느릿느릿 흔들거린다. 바닷속 뜨거운 요람을 빠르게 흔들고 싶은 인간의 손은 필요 없다. 심해는 자신의 속도에 맞춰 움직였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날 수 있었다. 지금도 심해는 뜨겁고, 살아있는 존재들을 위해 천천히 요동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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