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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난만한 탕녀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조민정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4월
평점 :
품절
평점
4점 ★★★★ A-
콜레트(Colette)는 <클로딘 시리즈>를 써서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세상에 알리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남편의 필명으로 <클로딘 시리즈>를 발표한 것이 그녀의 작가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 남편은 콜레트에게 <클로딘 시리즈>를 뛰어넘을 작품을 써내라고 강요했고, 콜레트가 쓴 글을 자주 고치곤 했다. 콜레트는 자신이 고생해서 재주 부리고, 명성이 남편에게만 쏠리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콜레트는 1906년에 남편과 이혼한다. 콜레트는 자신의 이름으로 《천진난만한 탕녀》(L’ingenue libertine)를 발표한다. 1904년에 발표한 중편소설 <민느>(Minne)와 이듬해에 나온 <민느의 방황>을 합쳐서 장편 분량의 글로 다시 쓴 것이다(‘민느’라는 번역본 표기 대신에 가독성을 위해 ‘민’으로 표기하겠다).
주인공 민은 열다섯 살의 사춘기 소녀다. 몽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도발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민은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란 소녀지만, 풋풋한 목가적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강렬한 쾌락이 느껴지는 위험한 사랑을 꿈꾼다. 소녀의 이상형은 살인 전과가 있는 불량배 패거리의 두목. 소녀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증을 몽상으로 해소한다. 민보다 세 살 많은 사촌 앙투안은 민의 성격과 정반대다. 앙투안은 민을 짝사랑하여 조심스럽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다. 그러나 민은 늦은 밤에 몰래 약혼자를 만나고 다닌다고 거짓말하면서 퇴짜를 놓는다. 민은 짜릿한 쾌락을 주는 사랑을 원할수록 몽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에 빠진다. 여기까지가 책의 1부 <민>의 줄거리다.
2부 <민의 방황>은 부부가 된 민과 앙투안의 이야기다. 2부에서도 민은 사랑의 쾌락을 누리고 싶어 한다. 앙투안과의 결혼 생활 2년 사이에 세 명의 정부를 만나고 다닌다. 정숙한 아내를 원하는 앙투안은 민의 바람기를 어느 정도인지 잘 알면서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민은 남편 몰래 자크 쿠데르크 남작이라는 정부를 만난다. 남작은 민보다 어린 스물두 살의 청년이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질투심이 많고, 애정 욕구가 강한 편이다.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이 민에게 구애해보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민은 아이 같은 남작을 좋아할 단순한 여자가 아니다. 남작은 민의 성적 노리개일 뿐이다.
<민의 방황>은 <민>보다 대담한 묘사가 많다. 1부가 시골에서 자란 작가의 어린 시절을 반영한 것이라면 2부는 도시적 관능에 익숙해진 작가의 세속적인 삶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두 이야기 속에서 민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그것은 성숙한 에로스(Eros)다. 여기서 말하는 에로스는 성적 욕망이 형성된 육체적 사랑이 아니다. 사랑받으려는 대상의 영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아름답게 해주는 진실한 감정을 의미한다. 성숙한 에로스가 없는 성적 대상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오로지 육체적 쾌락만 좇을 뿐이다. 성숙한 에로스의 손길을 받지 못한 민은 이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긴다. 그리고 에로스의 부재를 견디지 못해 평범한 결혼 생활에 권태를 느낀다. 이를 참지 못해 자신의 이상형에 환상만 가득 부여한다. 이러한 민의 태도는 플로베르(Flaubert)가 소설에서 창조한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와 유사하다. 그러나 두 여성의 결말은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마담 보바리는 진실성 없는 사랑에 집착하는 바람에 불행한 파멸에 이른다. 민은 육체적 쾌락만 좇는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한 끝에 그토록 자신이 만나고픈 에로스가 어디 있는지 깨닫는다.
민이 성숙한 에로스를 만나기까지 방황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우리나라 정서상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변덕스럽고 자유분방한 주인공의 성격과 ‘탕녀’라는 단어는 ‘잘못된 만남’이다. ‘libertine’는 ‘libertin’의 여성형 명사다. ‘libertin’은 도덕적 규범과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이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사상가나 무신론자, 즉 계몽주의자를 일컫는 말이다.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libertin’은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는 난봉꾼을 뜻하는 단어가 된다. ‘천진난만한 탕녀’는 콜레트에게 어울리지 않는 작품명이다. 《천진난만한 탕녀》는 음탕한 육체적 쾌락주의자를 묘사한 소설이 아니다. 여성이 진정 느끼고 싶은 욕망과 쾌락의 유형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 2016년에 쓴 서평을 고쳐 썼다. 글 제목도 바꿨다. 불필요한 문장을 걸러내고, 한 문장을 최대한 짧게 썼다. 번역본 제목의 문제점을 지적한 내용을 서평에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