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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에 빠진 뇌 - 신경학적 불균형이 만들어낸 멈출 수 없는 불안
제프리 슈워츠 지음, 이은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7월
평점 :
평점
4점 ★★★★ A-
기벽(奇癖): 남달리 기이한 버릇
기벽(嗜癖): 한쪽에 치우쳐서 즐기는 버릇
기벽(氣癖): 자부심이 많아서 남에게 지거나 굽히지 않으려는 성질
킁킁. 새 책을 사면 제일 먼저 종이 냄새를 맡는다. 책의 띠지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양장본 커버가 없으면 허전하다. 책을 읽다가 특정 단어에 확 꽂히면 생각이 많아진다. 특정 단어를 골똘히 분석하기 시작하면 다음 장으로 넘기지 못한다. 일단 읽고 있던 책을 덮는다. 특정 단어를 알기 위해 도움이 되는 다른 책을 찾아본다. 오역으로 생각되는 문장을 발견하면 책 읽기를 멈추고, 그 문장의 원문을 찾는다. 책의 귀퉁이가 접혀 있으면 바로 편다. 책이 냄비 받침대로 쓰이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이런 괴팍스러운 성미를 모두 가진 사람이 있다? 그래, 바로 나다. 책 앞에서 예민해지고, 책 읽을 때 강박행동을 보이는 내 모습들이다. 이 모든 행동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버릇(奇癖)이다. 과거에는 이런 행동을 ‘병적인 행동’이나 ‘병증’으로 취급했다. 이상한 ‘기벽’의 ‘벽(癖, 버릇 벽)’은 ‘疒(병들어 기댈 녁)’과 ‘辟(물리칠 벽)’이 합쳐진 한자다. ‘癖’의 또 다른 뜻은 ‘적취(積聚)’다. 적취란 몸 안에 쌓인 기가 너무 많이 쌓여 덩어리가 생겨서 아픈 병을 의미한다. 좀처럼 고치기 힘든 기벽은 몸과 정신을 집어삼키는 ‘괴물’이다. 기벽이 있는 사람은 쓸모없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답답해하고 불안감을 느낀다. 이때 보이지 않는 괴물이 옆에서 속삭인다. “이렇게 안 하면 넌 살 수 없어. 당장 해!”
책만 보면 내게 간섭하고 조종하는 괴물과 함께 산 지 어언 13년이 되었다. 독서와 글 쓰는 일에만 매달리는 기벽(嗜癖)도 함께 살고 있다. 나쁜 기벽의 입김이 너무 세서 드라마와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다. 나는 이 괴물들의 정체를 확실히 알고 싶어서 《강박에 빠진 뇌: 신경학적 불균형이 만들어낸 멈출 수 없는 불안》을 만났다. 제일 먼저 책 뒤편에 있는 <강박사고 및 강박행동 점검표>를 펼쳤다. 점검표는 총 27개의 문항으로 되어 있다. 예상대로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강박사고가/강박행동이 있을 수 있다’라는 결과가 나왔다. 강박사고는 원치 않는데도 계속 떠올라 괴로움을 주는 생각이다. 강박사고가 불러일으키는 두려움과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강박행동이라 한다. 예를 들어 자신 주변에 세균이 너무 많아서 질병에 걸릴 거라고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면 ‘강박사고’에 해당한다. 비현실적인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손 씻는 일에 집착하면 ‘강박행동’이다. 강박사고와 강박행동이 강박 병증 환자와 그 주변 사람들의 삶을 괴롭히고 무참히 파괴하는 수준에 이르면 ‘강박장애’가 된다.
《강박에 빠진 뇌》의 저자 제프리 슈워츠(Jeffrey Schwartz)는 강박장애를 ‘아주 탐욕스러워서 만족할 줄 모르는 괴물’로 비유한다. 강박장애 환자는 이 괴물의 정체를 모른다. 자해하는 ‘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괴물에 뜯어먹힌 채 생활한 지 오래될수록 자존감은 낮아진다. 자존감이 너무 낮아지면 삶은 텅텅 비어 있고 야위어진다. 가벼워진 삶은 자기 비하의 늪에 한 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살려는 의지가 남아 있지 않다.
보이지 않는 괴물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나면 확실히 ‘내’가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내’가 아니라 ‘뇌’가 문제다. 뇌는 때때로 우리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메시지를 전달받은 여러 신체 기관은 뇌의 잘못된 명령만 믿고 작동한다. 착시 현상에 속는 우리의 반응은 뇌의 속임수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가벼운 오작동에 속한다. 하지만 강박장애는 너무 자주 일어나고, 너무 오래 방치하면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위험한 오작동이다.
강박장애는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 괴물이 아니다. ‘뇌가 잘못 보낸 괴물’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자기 주도 행동 치료 4단계 중 첫 번째 단계는 ‘재명명’이다. 이 괴물의 정체를 확실히 알면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 ‘너는 또 날 괴롭히려고 찾아온 강박장애야!’ 나를 괴롭히는 녀석을 알았으면 왜 나타났는지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자기 주도 행동 치료 두 번째 단계는 ‘재귀인’이다. ‘뇌가 또 장난치려고 하는구나.’ 이 단계까지 오는 과정이 익숙해지면 강박장애 괴물이 불쑥 찾아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면 강박사고가 떠올리거나 강박행동이 나타나는 횟수가 줄어든다. 강박장애 괴물을 제압하려면 ‘공정한 관찰자’를 활용해야 한다. ‘공정한 관찰자’는 자신의 진짜 내면을 잘 아는 존재다. ‘공정한 관찰자’가 내민 손을 잡으면 강박장애 괴물과 격렬하게 싸울 때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고, 나를 괴롭혔던 강박장애가 뇌에 생긴 화학적 문제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강박사고와 강박행동의 실체를 확인했으면 진짜 나의 모습, 내가 진정 원하는 감정과 욕구가 무엇인지 파악한다. 여기서부터 내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재 초점’ 단계에 시작된다. 마지막 단계인 ‘재평가’에 도달하면 강박사고와 강박행동이 내 삶에 불필요한 것임을 인식한다.
강박장애가 만든 ‘기벽(奇癖)’은 ‘기벽(氣癖)’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 강박장애 환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기벽(氣癖)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있어야 할 기벽은 자부심이 많아서 남에게 지거나 굽히지 않으려는 성질이다. 좋은 기벽이 있으면 삶의 의지와 의욕이 강해진다. ‘공정한 관찰자’는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 또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 강박장애 괴물과의 싸움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그 녀석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강박장애를 포함한 모든 질병을 완전히 치유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이 비대해지면 강박사고로 변할 수 있다. 죽일 수 없어도 절대 질 수 없다는 의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의지가 없으면 강박장애 괴물에 먹히고, 진짜 내 모습은 사라진다. 기벽이 충만하면 뇌의 악랄한 장난질을 멈출 수 있다. 내 삶의 가치를 높여주는 건설적인 행동을 하면 뇌를 고칠 수 있다. 뇌를 바꾸면 진짜 나로 바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