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 작가의 소설집 《인생 연구》에 실린 『베티 블루』는 미스터리 소설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글이다. 화자는 어린 시절부터 알게 된 ‘베티 아줌마’라는 인물의 삶을 관찰하듯이 묘사한다.
[대구 서점 <일글책> 6월 독서 모임 선정 도서]
* 정지돈 《인생 연구》 (창비, 2023)
소설 시작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전개된다. 소설은 베티 아줌마가 병원에 입원한 장면에서 시작된다. 병원 관계자는 아줌마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보호자인 화자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줌마를 데려가라고 한다. 어머니는 화자인 ‘나’와 함께 병원에 가서 아줌마를 데려온다. 그런데 아줌마가 생각보다 이상하다. 아줌마의 말에 따르면 자기 집의 벽이 말을 건다. 게다가 냄새까지 난다고 주장한다. 아줌마와 오랜 친분이 있는 어머니 역시 아줌마의 알 수 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이렇게 판단할 것이다. 베티 아줌마는 참말로 이상한 사람이구나. 왜 저렇게 됐지? 아줌마와 어머니는 어떤 계기로 인연을 맺기 시작했을까. 독자는 한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소설을 읽어나간다.
하지만 『베티 블루』는 독자의 기대를 저버린다. 아줌마는 본인의 기억에 지우고 싶은 안 좋은 일을 겪은 시점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건 맞다. 그러나 다 읽었는데도 여전히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여운이 남는다. 아줌마는 자기가 일한 보험회사의 영업부 부장과 사랑에 빠지는데, 부장은 유부남이고 바람둥이다. 결국 둘의 관계는 부장의 아내에게 들통나버리고, 화자가 표현한 대로 ‘작살이 났고 또 구급차 신세를 졌다.’ 부장의 아내에게 크게 혼쭐이 난 이후부터 아줌마는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병원에서 퇴원한 아줌마는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다. 그리고 온 방에 불을 다 꺼놓고 은박 돗자리를 담요처럼 싸맨 채 지낸다. 아줌마는 단지 전자파가 몸에 안 좋다는 이유로 외부와 단절된 삶을 선택한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아줌마는 왜 갑자기 전자파를 두려워하게 된 것일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독자의 궁금증은 하나둘씩 늘어난다. 이러면 독자는 다시 한번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도대체 작가는 베티 아줌마의 삶을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걸까?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
나는 원래 소설을 읽으면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세세하게 분석하는 습관이 있다. 그렇지만 《인생 연구》만큼은 기존 방식대로 읽지 않았다. 최근에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해석에 반대한다》를 다시 읽은 이후부터 소설 분석에 중점을 둔 읽기 방식을 잠시 멈추었다.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기를 멈춘 셈이다.
만약에 『베티 블루』가 ‘해석하면서 읽는 텍스트’가 아니라면, 이 작품은 ‘맥거핀으로 시작해서, 맥거핀으로 이어져서, 맥거핀으로 끝나는 소설’이다. 맥거핀(MacGuffin)은 앨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처럼 나오거나 언급되는 소품 또는 인물의 대사가 실제로는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극적 장치를 뜻한다. 따라서 맥거핀은 영화나 소설이 끝날 때까지 구체적인 정체나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맥거핀의 역할은 이야기가 전개되도록 하는 결정적인 장면 또는 사건인 것처럼 보여줘서 독자의 관심을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맥거핀에 속은 독자는 그것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중요한 단서라고 믿으면서 소설을 읽는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고 나서야 특별한 의미가 없는 소품 또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은 독자는 소설에 대한 해석을 제대로 내놓지 못한다.
『베티 블루』를 다 읽고 나서도, 또 여러 번 읽었는데도 베티 아줌마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어떤 독자는 『베티 블루』 이외에 《인생 연구》에 실린 다른 작품들을 끝까지 다 읽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자책감을 느낀다. 심지어 자신의 문해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본인의 읽는 방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
『베티 블루』가 정말로 맥거핀이 가득한 소설인지 단정할 수 없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쓴 것이라면 맥거핀으로 볼 수 있다. 정 작가가 그렇게 썼다고 인정해야지만 내 견해가 사실로 판명된다.[주] 『베티 블루』가 ‘맥거핀 소설’인지, 아닌지 따지는 건 시간 낭비다. 혹시나 해서 《인생 연구》를 이미 읽은 분들에게 사죄한다. 아마도 이분들은 내 글이 난해한 베티 아줌마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이 글 자체가 ‘맥거핀’이다.
[주] 원래 이 글에 『베티 블루』에 맥거핀으로 ‘추정하는’ 각종 설정을 제시하려 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글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설명을 생략했다. 사실은 맥거핀이라고 주장하는 데 힘을 실을 수 있는 나의 근거가 논리적으로 빈약하며 비약이 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