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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연구 - 정지돈 소설집
정지돈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평점 :
글쓴2: 2것은 서평2 아니다.
???: 그러면 뭔데?
글쓴2: 글쎄?
※ 글쓴2 소개
서평2 아닌 2 글은 대구 출신 최해성(닉네임은 cyrus, 사2러스)과 대구 출신 정지돈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은 ‘정지돈 마니아’지만, 아직 《인생 연구》를 읽지 않은 ‘서울 출신 최해성’, 줄여서 서해성(본명은 서한용)2 함께 썼다.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정지돈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서해성 같은 애서광이 이 작가에게 깊은 존경을 표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번 달에 두 번 참석하는 독서 모임 선정 도서가 《인생 연구》라서 서둘러 읽었지만, 비범하되 소략한 저 책은 내 조갈증을 돋울 뿐이었다.[주1]
누군가 말할 것이다. 이딴 게 소설이냐고? 나는 최해성이지만 서해성처럼 정 작가의 팬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인생 연구》가 소설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 연구》 앞표지에 ‘정지돈 소설집’이라는 작은 글자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맞잖아? 만약에 ‘정지돈 소설집’이 안 적혀 있었다면 사람들은 이 책이 ‘인생철학’을 주제로 한 철학책으로 착각하지 싶다.
그래도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고 여전히 믿는 분들을 위해서 내 나름대로 《인생 연구》를 소설로 봐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겠다. 《인생 연구》는 이전에 나온 소설들과 비교하면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과거에 나온 소설의 형식은 정형화되어 있다. 줄거리는 시간순으로 진행된다. 소설 속(또는 소설 밖) 화자는 한 사람이다. 화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한결같이 설명한다. 등장인물은 가공인물이지만 독자인 우리의 성격과 거의 비슷하며 우리 삶과도 일치한다. 그래서 독자는 등장인물의 삶과 행동, 감정 그리고 발언에 공감하고 자신의 삶을 대입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소설에 나온 인물들에 친근감을 느끼거나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아가는지 이해한다.
하지만 《인생 연구》는 그렇지 않다. 《인생 연구》에 실린 몇 편의 소설을 읽어보면 과거에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 유행하면서 등장한 파격적인 서술 방식들을 확인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들은 과거의 서사 형식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전통적인 작문 형식을 의도적으로 비튼다. 무의식의 흐름에 따른 화자의 서술 방식, 순차적 서술 방식 무시, 의미 없는 말장난에 가까운 인물들 간의 대화,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의 기상천외한 기행(奇行).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들은 독자들이 보기에는 난해하고, 상당히 불친절하다.
평점
3.5점 ★★★☆ B+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와 같은 박학다식한 소설가들은 다른 책에 나온 문장을 인용하기도 한다. 정 작가도 이런 식으로 소설을 썼는데 특히 《인생 연구》에 실린 소설 『나, 슈프림』을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평론가는 정 작가의 파격적인 글쓰기가 이미 과거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것이라서 새롭지 않다고 비판했다. 결국 독자는 난해한 소설을 본인만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
《인생 연구》는 ‘플럭서스 소설’이다. 플럭서스(Fluxus)는 ‘계속되는 변화’, ‘(물의) 흐름’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1960년대에 유행한 전위예술 운동의 명칭이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자본주의에 순응한 기성 예술과 대중문화를 거부한다. 그들은 우연과 일시성을 강조하는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과거 예술 작품은 ‘아름다운 결과물’이다. 하지만 플럭서스가 지향하는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 ‘과정’이다. 그들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객들도 참여한다. 결과물을 중시하는 기성 예술에 반발한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스스로 자기 작품들을 파괴하고 해체했다. 여기에 관객들도 동참할 수 있다. 이것이 플럭서스가 강조하는 ‘반예술’이다. 기성 예술은 돈 많고 고상한 엘리트의 전유물이었고, 미술관은 그들만을 위한 신전이다. 하지만 플럭서스의 반예술은 순전히 우연에 맡기며 대중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행위로만 이루어진다.
플럭서스의 등장으로 예술가의 정의는 달라졌다. 예술가는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플럭서스 예술 운동을 이끈 요셉 보이스(Joseph Beuys)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주2]. ‘플럭서스 소설’ 《인생 연구》를 무난하게 읽으려면 독자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 《인생 연구》는 독자의 역할을 부추기는 플럭서스 소설이다. 독자의 역할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능동적인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본인이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인생 연구》를 읽는다. 그러면서 소설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부여한다. 독자의 해석은 ‘정답’이 아니다. 고정적이지 않다. 변할 수 있다. 어떻게든 작가가 좋아할만한 해석을 고집하는 독자는 종이 위의 독재자다.
서해성은 정 작가의 글이 재미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정 작가의 글을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다시 본다면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재미를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최해성은 아니라고 한다. 플럭서스 소설을 읽는 순간 보통의 독자는 플럭서스 독자가 된다. 처음에 아주 재미있었던 작가의 농담은 시간이 지나면 재미없게 느껴질 수 있다. ‘정지돈식 농담’은 독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 나타난다. 미리 한 번 알게 된 이상 다시 읽으면 처음 느낀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같은 강에 발을 담근 사람들에게 다른 강물이, 그리고 또 다른 강물이 계속해서 흘러간다”라고 말했다[주3]. 어제의 강과 오늘의 강은 다르다. 어제 《인생 연구》를 읽은 독자와 오늘 《인생 연구》를 읽은 독자는 다르다. 우리는 플럭서스다! 《인생 연구》는 그런 책이다. 재밌다고들 하지만, 두 번 다시 읽지 않을 책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은 있어도 한 번 해성은 영원한 해성은 없다.
[주1] 이 글의 첫 문단을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뒤표지에 실린 신형철의 추천사와 같이 읽어보길 권한다.
[주2] 오자키 테츠야, 원정선 옮김,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 북커스, 2022, 373쪽.
[주3] 김인곤, 강철웅, 김재홍 외 옮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2005, 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