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하다

 

[1] 매우 또는 여기저기가 야들야들하게 보드랍고 무르다.

[2] 사람의 몸이나 기질이 야무지지 못하고 맺힌 데가 없어 약하다.





고급 양장으로 만들어진 오래된 가족 사진첩은 딱딱하고 무겁다. 책장 깊은 구석에 꽂힌 사진첩을 꺼내면 여간 성가시다. 사진첩에 사진을 소중히 넣어 보관한다고 해도 누렇게 변한다사진에 그날의 순간이 남아 있지만, 그날의 감정은 남아 있지 않다세월이 지날수록 사진만 변색하는 게 아니라 사진에 드러난 감정까지 탈색되기 때문이다. 사진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기억하려면 글로 기록해야 한다그러면 세월에 의해 닳아져서 사라지기 쉬운 내 인생의 어떤 순간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다.






이도 글 · 그림 이도 일기》 (탐프레스, 2022)




이도 일기말랑말랑한 그림첩이다[1]일상의 순간을 사진으로 담는 대신에 이도 일기처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면 좋은 점이 있다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으며 사진 변색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그리고 사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순간의 감정을 힘겹게 떠올리면서 찾지 않아도 된다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이도독립출판 단편소설 보름달》(2018)을 쓴 작가다. 출판 스튜디오 탐프레스(tampress)’에서 펴낸 문집 W. 살롱 에디션집필진으로 참여했다글이든 그림이든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개인의 삶을 기록하는 행위는 일종의 독백이다. 기록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누구든 내 이야기를 봐주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드러낸다. 저자의 독백은 자기 내면과 주변 세상을 꾸준하게 들여다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전혀 가볍지 않다


이도 일기에 나오는 주요 인물은 저자의 반려인과 반려묘. 저자는 단독 주택에서 이들과 함께 보낸 사소한 일상뿐만 아니라 살면서 불쑥 튀어나오는 걱정과 고민을 들려준다.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머리 안에서만 머물면 가슴이 짓눌린다. 삶을 압박하는 내밀한 고통은 어느 순간 일상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더 무거워지기 전에 부정적 감정을 모조리 털어내어 한 자 한 자 기록하다 보면 자신을 괴롭히는 감정의 원인을 찾게 되어 고통이 옅어진다. 저자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인정하면서 글을 쓴다. 작년부터 쓰기 시작한 저자의 글을 읽으면 그녀의 말랑말랑한 마음[2]이 점점 단단해짐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단어의 의미를 허투루 보지 않을 정도로 민감하다. 그녀는 작년 521일에 쓴 글에서 여성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낡은 속담들을 비판한다.






 사위 관련 속담이 궁금해 검색했다. 10개 중 하나 빼고는 긍정적인 의미였다. 다시 며느리로 검색했는데 관련 속담 109개 중 긍정적인 게 없다. 끝까지 읽기 힘들 정도였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여성의 다양한 역할 중 하나일 뿐, 결국 한 사람이다. 자아 분열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려면 오래되고 이상한 속담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109개의 속담 중 다음 세대에 남겨줄 만한 게 1도 없다.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다


(51)



누군가는 개인적 생각을 일기로 써서 공개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 것이다하지만 글 쓰는 사람이라면 특정 대상에 편견을 덧씌우는 단어와 문장에 민감해져야 한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 사전에 딱 달라붙은 그 이상한 단어를 펜으로 깨뜨려야 한다펜은 단어보다 강하다.

     




















[레드스타킹 20226월 도서] 임솔아, 김멜라, 김병운, 김지연, 김혜진, 서수진, 서이제 2022 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22)





단어에 균열을 내는 글쓰기올해 젊은 작가상 수상작김지연의 단편소설 공원에서에 나오는 주인공의 비판 의식과 닮았다소설 속 주인공은 여자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속담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전에 인간의 온갖 차별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고루한 역사가 반영된 단어를 깨부수면 빈칸이 생긴다. 김지연 작가는 공원에서의 작가 노트 제목을 빈칸을 채우시오로 정했다. 그녀는 사전에 있는 차별적인 단어를 해체하면서 생긴 빈칸에 어떤 말을 채울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소설을 썼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무엇이든 쓸 수 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도 작가는 20211028일 일기에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말을 인용한다.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 그것만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고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일은 개인적이고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이도 작가는 W. 살롱 에디션 Vol. 2: 쓰는 여자에 수록된 자신의 글 소설, 쓰는 사람에서 소설을 쓸 때면 소설가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글쓰기 욕망이 생기면 세상을 향해 쓰겠다고 다짐한다






* 김정희, 권지현, 이도, W.살롱 커뮤니티 참여자들 

W. 살롱 에디션 Vol. 2: 쓰는 여자_ 펜은 눈물보다 강하다》 

(탐프레스, 2020)




이도 작가는 2020년의 다짐을 올해에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도 일기는 단독 주택과 작업실을 넘어 힘차게 세상으로 나아갔다세상을 향해 꾸준히 쓰고 있는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 《이도 일기정오표



* 50



 영빈은 J에 비해 나를 훨씬 많이 알고 있지만 J 영빈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할 때가 있다.


J J






* 61

 




핼로윈 핼러윈






* 152





자세히 보니 검의 때가 잔뜩 묻은 치즈 아깽이었다.

 

검의 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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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2-07-03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담이 오래된 글이었기에 더욱 성차별적인 내용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속담마저도 자주 쓰지 않는 우리 세대는 과연 얼마나 성차별적인 표현들을 자주 쓰고 있나 검열해봐야겠어요. 22년 수상작품집 다 읽었었는데, 급하게 읽느라 말씀하신 문제 의식을 깨닫지 못했네요.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cyrus 2022-07-03 20:13   좋아요 0 | URL
저는 <공원에서>의 주인공처럼 사전의 단어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식으로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책을 읽다가 미심쩍은 단어를 마주하면 그냥 못 넘어가요. 종종 사전의 의미를 나름 비판하면서 재해석한 글을 몇 편 쓴 적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노가다’였어요.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에 ‘노가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당시에 그 단어를 보자마자 ‘이건 아니다’라고 바로 느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