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여러 얼굴 (양장) - 과학자, 가치, 사회 입문
레슬리 스티븐슨.헨리 바이얼리 지음, 이상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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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탈레스(Thales)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 보았다. 물은 생명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 안 되는 물질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 안 되는 물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돈이다. 돈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탈레스는 다방면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집트에 있는 피라미드의 높이를 쟀을 정도로 수학에 대한 지식을 갖추었고, 천체 관측을 해서 일식이 나타나는 시기를 예언했다. 철학자 또는 과학자는 물질적 욕심이 없거나 돈 벌 줄 모르는 서생이라는 선입견을 깬 사람이 탈레스다주변 사람들이 철학을 먹고 사는 데 도움이 안 되는 학문이라면서 비아냥거리자, 기후를 관측할 수 있었던 탈레스는 올리브 농사가 잘되는 해를 예상했다. 그런 다음 올리브기름 압착기 소유주에게 찾아가 기계를 빌릴 수 있는 권리를 헐값으로 샀다(여러 개의 압착기를 사들였다는 이야기도 있다)그의 예상대로 올리브 풍년이 들었고, 농부들은 엄청난 양의 올리브 열매로 기름을 짜기 위해 압착기를 구해 나섰다. 결국 모든 압착기의 사용권을 가진 탈레스는 큰돈을 벌었다탈레스는 학문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망에 영향을 주는 상황에도 관심을 가졌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에 따르면 탈레스는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하려면 이오니아의 도시국가들이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러한 탈레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과학자도 경제적 수완이 있으면 돈을 벌 수 있고, 국가를 위해서라면 사회 참여적 발언을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과학자의 모습에서 꼭 빠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그와 그녀들이 입고 다니는 하얀 실험실용 가운이다. 틀에 박힌 이미지 때문인지 실험실 소장이 아닌 경영인 또는 회사 CEO가 된 과학자는 상상하기 힘들다과학자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윤리와 양심을 무시한 채 실험을 강행하는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같은 나쁜 과학자를 떠올릴 것이다실험실에 상주하는 과학자 이미지가 각인된 대중은 경영인이 된 과학자의 등장을 우려한다. 실험실용 가운이 아닌 정장 차림을 한 과학자들이 낯설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그와 그녀들이 사리사욕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그렇게 되면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과학자와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과학자들이 못마땅하게 여겨지기 시작한다. 그와 그녀들이 국가나 공공기관으로부터 받은 지원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일 것이다


이처럼 대중이 생각하는 과학자의 유형은 매우 단순하다. 실험실 안에서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연구에 매진하는 과학자. 우리는 어렸을 때 이런 과학자가 되기를 원했고, 과학자라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영화의 악당으로 자주 묘사되는 나쁜 과학자가 현실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다행히 세계를 정복하려는 과학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법인 회사를 차리거나 대기업 간부로 일하면서 고액의 연봉을 받는 과학자들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이렇게 좋고 싫음으로 판단하면 과학자를 이해할 수 없다. 과학자는 여러 가지 얼굴을 동시에 가진, 매우 다양하면서도 복잡한 인간이다.


과학의 여러 얼굴은 하나의 빛에 가까운 과학과 과학자의 유형을 폭넓은 스펙트럼처럼 만들어주는 프리즘과 같은 책이다. 어떤 이는 과학을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 학문으로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은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이 초래하는 각종 부작용(연구 윤리를 무시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 등)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가치중립성부작용에만 초점을 맞춘 채 과학을 바라보면 과학이 우리 일상에 미치는 이로운 점과 부작용을 철저히 구분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화될 수 있다. 가치중립적 과학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과학은 과학자가 과학을 연구하는 동기, 정치, 이념, 경제성 등에 영향을 받기 쉽다이러한 외부적 요인들이 한데 섞인 과학이 형성되거나 과학자가 등장할 수 있다.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과학자가 있는가 하면 국익을 위해 국가가 주관한 연구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과학자가 있다.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 정치인이나 경영인에 접근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그와 그녀들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연구 성과를 정책으로 전환하기 위해 로비를 펼친다.


과학 이론이 정책으로 전환되는 데 성공하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업적이 되는 동시에 과학자의 평판이 높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국익을 위해 연구하는 과학자나 정치인과 경영인의 지원을 받는 과학자를 사리사욕을 채우는 인물로 단정해서 안 된다. 좋은 과학자나쁜 과학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목록을 만들 필요 없다. 과학자를 딱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과학과 과학자에 대한 이원론적 인식은 흡사 로마 신화의 수호신 야누스(Janus)와 같다. 야누스는 두 가지 얼굴(네 가지 얼굴로 묘사하기도 한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학문이다. 시간과 상황에 따라 과학(자)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기도 한다. 과학의 여러 얼굴은 과학과 과학자의 유형을 협소하게 만드는 이원론적 인식을 비판하고, 이것을 분산 시켜 일반 대중이 제대로 보지 못했던 다양한 얼굴의 과학과 과학자들을 보여준다유럽 및 백인 남성 중심의 과학 또한 과학의 여러 얼굴을 보기 위해서 반드시 해제되어야 할 학문이다. 이 책은 비유럽 출신의 과학자와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을 소개한다.


과학의 여러 얼굴은 과학이 인간을 이롭게 해준다는 낙관론과 과학의 부작용에 지나치게 걱정하는 비관론 모두를 비판한다. 다만 낙관론과 비관론 둘 다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려면 대중이 과학이 실생활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점검하고, 과학의 부작용을 비판해야 한다. 과학자는 대중의 관심에 응답해야 한다. 자신의 연구 성과에 대한 비판적 의견에 경청해서 문제점을 수용한다면 이를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과학자들도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실험실에 틀어박혀 연구한다고 해서 돈은 생기지 않는다. 탈레스처럼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야 하든가 아니면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처럼 부업을 해야 한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고, 연구비를 마련하기 위해 외국인들에게 군사학과 건축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생계유지와 진리 발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은 과학자들은 정부와 기업의 원조를 외면하지 못한다. 정부와 기업과 손잡은 과학, 즉 경제성이 있는 사업이나 다름없는 거대과학(big science)은 가치중립성과 거리가 멀다이 책은 가치중립성이 없는 거대과학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다라는 명제를 현실에 맞지 않는 통념으로 본다. 그러나 정부나 특정 집단의 권력 확장을 위해 봉사하는 거대과학의 등장을 우려한다. 권력과 완전히 밀착된 거대과학은 통제가 불가능한 집합적 프랑켄슈타인(373)’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거대과학이 위대한 과학을 파괴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독일 나치 정권을 지지한 과학자들은 아리아인 순혈주의에 열광한 나머지 아인슈타인(Einstein)을 포함한 유대인 과학자들의 업적을 깡그리 무시했다. 스탈린(Stalin) 정권의 비호를 받은 소련의 학자 리센코(Lysenko)는 소비에트 체제에 맞지 않는 멘델(Mendel)의 유전법칙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지한 소련 과학자들을 숙청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여러 얼굴을 가진 과학은 진리 탐구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정적이고 순수한 학문이 아니다. 정적인 과학은 상아탑 속에 있다. 과학 또는 과학자가 온실 같은 상아탑에 오래 있으면 사회 현실에 무감각해지며 대중의 비판적 목소리를 감당하는 힘이 부족해진다. 역동적인 과학은 사회와 끊임없이 연결하고, 대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발전한다. 과학의 정의가 더욱 풍성해지고, 이와 관련한 논의의 범위가 확장되면 누구나 과학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과학일수록 튼튼하고 오래 간다.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 52





영국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시 마녀(Lamia)[주1]



[주1] 라미아(Lamia)는 마녀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괴물 이름이다. 여성의 상반신과 뱀의 하반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 60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용감한 신세계(Brave New World)[주2]



[주2] brave’용감한을 뜻하는 현대 영어가 아니라 중세 영어다. 중세 영어의 ‘brave’멋진을 뜻한다





* 98





                [주3] 아이슈타인 → 아인슈타인




 

* 366





[주4] 매듀 아늘드


[2021년 9월 23일 업데이트] 

아놀드의 원 발음이 아늘드

이 책에 나온 외국어는 외래어표기법에 따르지 않고 원음에 가깝게 표기되어 있다(‘일러두기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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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9-22 2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과학의 영역에까지 넘나 들다니
대단하시네요 정말.

전 소설책만 줄창 읽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사회과학
책들도.

cyrus 2021-09-23 20:25   좋아요 1 | URL
저는 소설을 잘 안 읽게 되네요. 달궁 모임에 참석해야 소설을 읽어요. ^^;;

hillbilly 2021-09-23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자세히 보셨네요.

라미아는 영국에서 보통 마녀라고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멋진 신세계라고 많이 번역하나, 헉슬리는 과학과 기술의 과감한 도입과 과학과 기술로 만들어낸 마약(LSD 등등)의 사용으로 얻는 새로운 감각과 사고를 중시하므로, 그런 것을 채용하는 신세계는 용감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오타 맞습니다.

아놀드가 아니고 아늘드가 원 발음에 가깝습니다.(이 책은 외래어 표기법보다 원 발음에 가깝게 적고 있습니다.)

cyrus 2021-09-23 20: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아놀드’의 원 발음이 ‘아늘드’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