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공개한 에드워드 O.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의 《창의성의 기원》에 대한 서평의 분량이 많아져서 그 글에 언급하지 못한 내용이 있다. 윌슨은 《창의성의 기원》에서 인문학과 과학의 통합(통섭)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계몽 운동’이 일어나 활기를 잃은 인문학이 부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 에드워드 윌슨 《창의성의 기원: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 (사이언스북스, 2020)
17~18세기 유럽 사상가들이 이성의 힘으로 구습을 타파하는 계몽 운동을 일으켰다면 ‘새로운 계몽 운동’은 과학의 힘으로 인문학의 한계(윌슨의 견해에 따르면 현재 인문학은 극심한 인간중심주의에 빠져 있다)를 보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레드스타킹 2021년 첫 번째 필독서]
*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에코페미니즘》 (창비, 2020)
[절판]
* 캐롤린 머천트 《자연의 죽음》 (미토, 2005)
오래전부터 계몽주의 사상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를 넘어서려는 목소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리아 미스(Maria Mies), 캐럴린 머천트(Carolyn Merchant)와 같은 생태주의 여성학자들이 바라보는 17~18세기 계몽 운동은 ‘극심한 백인 남성중심주의’가 지배한 사조다. 계몽 운동의 등장에 탄력을 받은 백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자본주의 체제는 자연과 여성을 식민화 대상으로 취급하여 착취한다. 《에코페미니즘》의 공동 저자 중 한 사람인 마리아 미스가 그 책에 실린 자신의 글에 여러 차례 인용한 문헌이 캐럴린 머천트의 저서 《자연의 죽음》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시시콜콜한 것까지 의심하고 따져본다. 다음 문장은 《창의성의 기원》에서 인용했는데 책을 보는 독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 《창의성의 기원》 106~107쪽
실험적인 미술과 비평이라는 온실 기후에서 별난 하위문화가 갑작스럽게 제멋대로 싹트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잘 가꾼 잔디밭에서 대담하게 버섯과 민들레가 자라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들 자체는 일관적인 설명을 거부한다. 다다이즘, 극사실주의 토마토 수프 깡통, 포스트모던 철학과 문학, 헤비메탈과 무조 음악이 그렇다.
[원문]
In the hothouse climate of experimental arts and criticism, it is not surprising that bizarre subcultures sprout abruptly and randomly, like courageous mushrooms and dandelions on an otherwise well-tended lawn. They defy coherent explanation itself: Dadaism, hyper-realistic cans of tomato soup, postmodernist philosophy and literature, heavy metal and atonal music.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토마토 수프 깡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챘으리라. ‘토마토 수프 깡통’은 팝 아트(pop art)의 대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대표작 중 하나인 ‘캠벨(Campbell) 수프 통조림’ 시리즈를 말한다.
워홀은 미국의 대중문화에 미술을 슬쩍 걸침으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다. 자신이 즐겨 먹은 캠벨 수프 통조림부터 시작해서 인기 연예인의 얼굴, 기성품, 심지어 자신의 모습까지 실크스크린(silk screen) 기법으로 종이 또는 캔버스에 옮겼다. 실크스크린은 짧은 시간 안에 대량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판화 기법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복제하는 워홀의 제작 방식은 그가 예찬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흡사하다. 팝 아트가 태동하기 시작한 미국은 날이 갈수록 비대해지는 자본주의 제국이었다. 공장을 짓고, 제품을 대량 생산했다. 여기에 맞춰 대중은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들을 소비했다. 대중이 문화를 소비하는 주체가 되면서 고고한 상류층만 즐기던 고급문화는 철 지난 문화로 전락한다. 상업성과 대중성을 추구하는 팝 아트는 기존 예술의 엄숙주의를 거부한다.
* 강홍구 《앤디 워홀: 거울을 가진 마술사의 신화》 (재원, 1995)
평점
3점 ★★★ B
워홀과 관련해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얇은 분량으로 된 《앤디 워홀》 뿐이다. 이 책을 쓴 강홍구는 서양화를 전공한 중견 사진작가다. 그는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품을 사실주의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 《앤디 워홀》 73쪽
워홀의 사진 이미지 실크스크린 작품들은 리얼리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리얼리즘이 아니며 심지어 리얼리즘의 한 단면도 아니다. 왜냐하면 워홀의 작품이 갖는 리얼리즘은 일어난 사건 자체가 진짜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을 이미지로 옮긴다는 점에서 획득된 것이기 때문이다.
워홀의 예술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워홀의 토마토 수프 깡통은 극사실주의로 볼 수 없다고 잠정 결론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