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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은 역사 - 한국 시각장애인들의 저항과 연대
주윤정 지음 / 들녘 / 2020년 10월
평점 :
평점
4점 ★★★★ A-
장애 역사(disability history)는 비장애인에게 생소한 분야이다. 장애 역사에 대한 생소함을 풀어줄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비장애인들은 장애 역사를 다룬 책이 단 한 권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보지 못한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책’, 즉 미출간된 책이라는 의미로 귀결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늦은 편이지만, 우리나라도 장애 역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연구 성과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비장애인은 이런 자료를 접할 기회가 없다. 그래서 비장애인들의 눈에는 장애 역사를 정리한 책들이 보이지 않았다. 책이 보이지 않으니까 역사 속에 있는 장애인들의 삶마저 보지 못한다.
《보이지 않은 역사》는 비장애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보이지 않은 역사》의 저자는 시각장애인 구술사 조사를 하기 위해 다양한 집단에 속한 시각장애인들을 만났다. 안마 일에 종사하는 시각장애인(안마 맹인), 점을 보는 시각장애인(점복 맹인), 구걸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시각장애인(구걸 맹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맹인 공동체의 역사를 기록하고 전승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자는 글자를 읽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이 어떻게 역사를 기록했고, 대대로 전승해왔는지를 살핀다.
시각장애인의 역사에 ‘차별’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속에 ‘저항’과 ‘연대’도 있다. 차별, 저항, 연대. 이 세 개의 단어는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의 삶이 압축되어 있다. 어느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된 주류 역사에 사회적 약자들의 역사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사회를 재편한 근대화를 중요하게 보는 역사학자들은 장애인을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집단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이 반영된 단어가 바로 ‘문맹’이다. 글자를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은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 되었다.
근대화는 계몽(enlightenment)과 궤를 같이 한다. 근대성이 시작되자 눈뜬 채 잠든 무지몽매한 대중을 깨워주는 시각 매체와 활자 매체(신문, 영화, 신식 문화를 소개한 인쇄물)가 보급되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은 시각 매체와 활자 매체에서 나오는 빛을 볼 수 없었다. 조선의 근대화에 앞장선 학자와 서구 선교사들은 시각장애인을 불쌍하고, 무능한 존재로 인식했다. 이때부터 시각장애인을 돕는 선교사들의 자선 활동과 조선을 통치한 일제의 시혜 정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을 통치한 일제의 시각장애인 보호 정책은 자신들의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을 알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포섭당한 시각장애인들은 ‘도움을 받고 살아야 하는 존재’ 또는 ‘근대화에 맞춰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식민화, 탈식민화, 근대화의 과정에서 시각장애인들은 독자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은 차별에 맞서 저항해왔으며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된 안마 사업권을 지키기 위해 서로의 몸을 줄로 묶어 다니면서 투쟁했다. 시각장애인의 구술 문화는 시각장애인 공동체를 설명해주는 ‘집단 기억’을 형성하게 했고, 공동체의 유산이 대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면서 ‘역사’가 되었다. 역사 속에 남은 시각장애인들의 모습은 무능한 사회적 약자가 아닌 사회 변화와 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주체적 인간이다. 《보이지 않은 역사》는 주류 역사 서술 방식에 익숙한 독자와 다양하고 역동적인 장애인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비장애인의 눈을 트이게 만든다.
※ Mini 미주알고주알
* 14쪽
게레멕 브로니슬라프 → 브로니슬라프 게레멕(Bronisław Geremek)
* 21쪽
엘레나 그로스 → 노라 엘렌 그로스(Nora Ellen Groce)
* 71쪽 각주
『거대한 변혁』 →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