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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죽음
캐롤린 머천트 지음, 이윤숙.전규찬.전우경 옮김 / 미토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원서 평점
4점 ★★★★ A-
번역본 평점
(평점을 준 이유에 대한 설명은 ‘미주알고주알’ EP. 6 참조)
1점 ★ F
태초의 신 가이아(Gaia)는 우주의 어머니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us), 바다의 신 폰토스(Pontus), 산의 신 우로스(Ouros)는 가이아가 낳은 자식이다. 헤시오도스(Hesiodos)의 서사시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가이아는 단성생식(처녀생식)으로 세 명의 자식을 낳는다. 지리를 뜻하는 ‘geo’의 어원이 ‘Gaia’다.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거대한 생명체로 보는 관점이다. 살아있는 지구는 생물체가 살기에 적합하도록 능동적으로 환경을 조정한다. 지진이 일어나고, 해일이 일고, 화산이 폭발하는 현상이 지구의 신진대사인 셈이다. 가이아 이론은 주류 학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가설이다. 회의적인 사고를 가진 학자는 가이아 이론이 경계과학(fringe science)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환경 문제와 지구 온난화가 인류 최대의 현안이 돼버린 지금 ‘살아있는 자연’은 주목해볼 만한 개념이다.
지구에 정착한 가이아의 자식들은 ‘살아있는 자연’을 칭송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과학이 발전했고, 자연친화적 신화는 뒷전에 밀려났다. 가이아의 가호를 잊은 자식들은 지리학(geography)에 열광했다. 똑똑해진 이들은 지리학자와 탐험가, 선교사가 되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대항해 시대, 즉 ‘정복과 확장의 시대’였다. 유럽에서 태어나고 자란 가이아의 자식들은 아메리카 대륙과 같은 새로운 땅을 개척한 자신들의 업적을 뿌듯하게 여겼다. 기고만장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을 침범했고, 그곳에 살고 있던 가이아의 자식들을 잔인하게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었다. 이 모든 일은 불과 두 세기 동안(16~18세기)에 일어났다.
《자연의 죽음: 여성과 생태학, 그리고 과학 혁명》(The Death of Nature: Women, Ecology,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은 자연을 죽게 만든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의 어두운 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책을 쓴 캐럴린 머천트(Carolyn Merchant)는 미국의 에코페미니스트다. 저자의 주요 연구 주제는 지구 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된 여성 문제, 과학사, 환경의 역사 등이다. 캐럴린은 고대의 세계관인 ‘살아있는 자연’이 인류에 지배받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전환된 시기를 과학 혁명이 일어난 16~17세기로 보고 있다. 과학 혁명 촉발에 기여한 과학자와 철학자들의 업적을 언급하고 있는 《자연의 죽음》은 과학사를 주제로 한 기존의 책과는 달리 균형 잡힌 서술이 눈길을 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등을 근대의 포문을 연 인류의 영웅처럼 그려지는 백인 남성 중심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과학의 힘에 취해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과정에 나타난 침략과 착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자연을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닌 ‘기계’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과 여성의 착취를 허용하는 학문으로 발전한다. 그 학문이 바로 과학과 철학이다. 그래서 저자는 베이컨과 뉴턴뿐만 아니라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와 같은 ‘근대 과학 건설의 아버지들’이 남긴 유산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 아버지들은 시대의 흐름을 바꾼 인물이지만, 그들의 업적은 ‘자연의 죽음’을 초래했다.
《자연의 죽음》에서 저자는 생태주의 관점을 통해 ‘과학’과 ‘진보’의 이름으로 착취당한 채 죽어간 자연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이 책의 서론 「여성과 생태론」은 페미니즘과 생태주의가 손잡으면서 함께 나아가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파생된 경쟁과 침략, 지배의 비용을 비판하는 관점이 저자가 생각하는 여성 운동과 생태주의 운동의 공통점이다. 그리고 여성 운동과 생태주의 운동은 성장지상주의와 과학기술의 힘에 기대는 낙관적인 진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저자는 ‘자연의 죽음’ 문제가 재난으로 번진 사건으로 1979년에 일어난 스리마일 섬(Three Mile island) 원전 사고를 거론한다. 과학기술의 혜택을 지나치게 믿는 과학지상주의는 결국 ‘인간의 죽음’까지 초래한다. 《자연의 죽음》이 나온 이후에도 가이아의 자식들은 못된 버릇을 버리지 않았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같은 재난을 일으켰고, 여전히 지구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중이다.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 재난을 일으킨 가이아의 자식들은 정말로 나쁜 자식(놈)들이다. 저자는 자연과 인간이 모두 공존하려면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 간다고 보는 생태주의에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자연의 죽음》이 나온 해는 1980년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환경운동가와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여러 갈래의 길을 열심히 찾고 있다. 사실 《자연의 죽음》은 초판 출간 40주년이 된 작년에 개정판으로 나와야 했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절판되었다. 나온 지 오래된 책은 절판되기 마련이지만, 역자의 무성의한 번역도 책의 수명을 짧게 만든다. 이 책에 세 명의 역자가 참여했다. 그런데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책에 오자가 많고, 외국 인명 표기도 엉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