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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권미선 옮김 / 사람과책 / 1996년 6월
평점 :
품절
번역서 평점
2점 ★★ C
단어가 비슷해서 헷갈리기 쉬운 제목이 있다.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의 원작 소설 《Ardiente Paciencia》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두 개의 제목이 생겼다. 그 제목들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와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민음사에서 출간된 소설 번역본 제목이다. 최근에 쓴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에 대한 네 편의 글을 다시 읽어봤다. 글 속에 소설 제목을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라고 쓴 부분을 몇 군데 발견했다. 어쩌면 지난 10월 말에 있었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책 모임에 참석한 필자는 제목을 여러 번 잘못 말했을지도 모른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나오기 전인 1996년에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가 출간되었다.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를 번역한 사람은 권미선 경희대학교 외국어대학 스페인어과 교수이다. 이사벨 아옌데(Isabel Allende)의 소설을 즐겨 읽은 독자라면 역자의 이름을 자주 봤을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는 정교수가 되기 전인 30대의 권 씨가 작업한 첫 번째 번역본이다. 부록으로 네루다의 시가 실려 있다.
줄거리 언급은 생략하겠다. 필자는 이미 《Ardiente Paciencia》와 네루다를 주제로 한 글을 썼다. 작품에 대해 궁금한 분은 필자의 졸문을 참조하시길.
사실 이 글을 쓴 목적은 번역문에 대한 견해를 밝히기 위해서다. 글 쓰는 일을 노동의 개념으로 본다면, 오래된 절판본의 번역을 지적하기 위한 글을 쓰는 일은 필자에게 소득―책을 구매한 사람이 그 책의 구매에 도움이 된 글 작성자에게 적립금을 주는 ‘Thanks to 적립금’ 제도의 혜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래도 책을 읽었으면 그 책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 대부분 독자는 자고 일어나면 나오는 따끈따끈한 신간에 주목하고 열광한다. 이 사람들은 도서관이나 헌책방에 가야 볼 수 있는 옛날 책에 관심 없다. 절판된 책의 서평도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연이든 필연이든 오래된 책의 실체를 알고 싶은 누군가는 이 글을 참고할 것이다. 알라딘 온라인 중고시장에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를 만 원에 파는 판매자가 있다. 현재 구할 수 없는 책, 권 교수의 첫 번째 번역서라는 점에서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는 특별해 보인다. 그러나 정가 6,500원의 책을 만 원 주고 사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는 번역이 좋은 책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 마리오는 주점에서 일하는 베아트리스 곤살레스를 첫눈에 보자마자 반한다. 마을에 운동장이 없어서 젊은 어부들은 주점에 설치된 테이블 축구를 즐긴다(민음사 35쪽 참조).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38쪽에 주점의 내부 광경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권 교수는 주점에 설치된 오락 기구를 ‘핀볼 게임(pinball game)’이라고 잘못 번역했다.
테이블 축구와 핀볼 게임은 생김새와 작동 방식이 다른 오락 기구다. 스페인어 원서에 ‘taca-taca’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단어는 테이블 축구를 뜻한다. 권 교수가 정말로 스페인어 원서를 참고해서 번역했다면 ‘핀볼 게임’이라는 단어가 나올 수 없다. 아니면 그녀가 테이블 게임을 핀볼 게임으로 착각했을 수 있다.
필자는 스페인어를 쓰거나 말할 줄 모른다. 그래서 문장 번역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겠다. 스페인어 원문, 민음사 번역본의 문장(우석균 옮김), 그리고 권 씨가 번역한 문장만 인용하겠다. 번역에 대한 판단은 스페인어에 능숙한 독자들의 몫이다.
* 원문
Estás húmeda como una planta. Tienes una calentura, hija, que sólo se cura con dos medicinas. Las cachas o los viajes.
húmeda: húmedo(축축한, 습한, 눅눅한)의 여성형 명사
planta: 식물, 풀
cachas: 기골이 장대하고 건장한 사람
viajes: 여행
* 민음사(우석균 옮김), 65쪽
“넌 지금 풀잎처럼 촉촉해. 후끈 달아올랐을 때에는 약이 딱 두 가지밖에 없지. 교미나 여행.”
어머니는 딸의 귓불을 놓고 침대 밑에서 가방을 꺼내 침대 위에 패대기쳤다.
“가방 싸!”
* 권미선 옮김, 72~73쪽
“넌 지금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 열병이 난 거야, 이년아. 거기엔 딱 두 가지 약밖에 없어. 몰매를 맞든지 아니면 짐을 싸든지 둘 중에 하나야. 빨리 짐이나 싸!”
현재 외래어표기법이 시행되기 한창 전에 나온 책이라서 외국 인명 표기가 어색하다.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 프랑스의 시인, 민음사 83쪽 참조)’을 영어 발음에 가까운 ‘프랑소와 빌롱(93쪽)’으로 표기되었다. 당통(Danton: 프랑스의 정치인, 민음사 119쪽 참조)을 ‘단톤(130쪽)’으로 표기한 것도 눈에 띈다.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함께 읽어 보면 확실히 문체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권 교수는 스페인어 원서에 있는 문장 일부를 두루뭉술하게 번역하거나 의역했다. 아마도 권 교수는 작품에 드러난 라틴아메리카의 정서 및 문화를 생소하게 여긴 90년대 독자들을 위해 직역보다는 가독성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번역을 시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