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註釋)은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쉽게 풀이한 글을 말한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옛사람들은 종교 경전에 적힌 모든 내용을 그대로 읽지 않았다. 경전을 공부한 사람들은 책이 귀했던 시대에 살았다. 그들은 특별한 장소(오래된 책들이 보관된 수도원의 도서관)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책을 어름어름 읽지 않았다. 수준 높은 학자는 책 속에 있는 구절이나 단어의 의미를 보충 설명해줄 수 있는 자신의 견해(저작권이 없는 시대에 살았던 학자들은 다른 책에서 본 내용을 베껴서 쓰기도 했다)를 여백에 적었다. 주석 쓰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주석가(exegetist)라고 한다. 경전의 여백에 익명의 주석가들이 남긴 주석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으면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또 다른 익명의 주석가는 주석들을 하나라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대담한 성격의 주석가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관점으로 경전 구절을 해석한 내용을 주석으로 쓰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쓴 주석을 비판하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주석을 새로 단 주석가도 있었다.

 

경전 한 권에 적힌 수많은 주석을 모아놓으면 또 한 권의 새로운 책이 된다. 주석만 모아놓은 책은 경전을 치밀하게 읽은 주석가들의 다양한 생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주석 전집은 경전 공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주석가들도 사람인지라 경전의 원문을 오독할 수 있다. 주석가가 경전을 공부하면서 실수로 내용을 잘못 이해했다면 너그러이 봐줄 수 있다. 그러나 지적 우월감에 빠진 채 허술한 설명의 주석을 달아놓거나 특정 종파 및 학자들의 집단을 옹호하기 위해 정직한 비판을 피한 주석가들은 경전의 소중한 여백을 줄어들게 만든 주범이다.

 

주석을 다는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학자들이 선호한 공부법이자 독서법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에 주석가라는 직업으로 알려진 유명한 사람을 손꼽기 힘들다. 명망 있는 주석가가 있어도 후대 사람들은 그를 학자로 보지 않는다. 어떤 책을 쓴 저자는 유명한 고대 및 중세 사상가를 학자 겸 주석가로 소개했다. 그러나 학자주석가를 서로 무관한 별개의 직업으로 볼 수 없다. 유명한 학자들은 주석을 달면서 공부했다. 후대의 학자들은 책의 여백에 남아 있는 선대의 흔적들을 쫓아 꼼꼼히 공부하고 분석했다.

    

 

 

 

 

 

 

 

 

 

 

 

 

 

 

 

 

* 표정훈 탐서주의자의 책: 책을 탐하는 한 교양인의 문..철 기록(마음산책, 2004)

 

평점: 3점   ★★★   B

    

 

 

도서평론가 겸 번역가 표정훈은 익명의 주석가(탐서주의자의 책에 수록)라는 글에서 책 읽는 사람(독서인)이란 기본적으로 주석가라고 말했다. 그가 새롭게 정의한 주석가는 책 속에 있는 지식과 정보를 모아서 재편집하는 지식 네트워커(knowledge networker). 지식 네트워커는 지금 들어도 생소한 단어다. 하지만 표 씨의 글이 나온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누구든지 글을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지식 네트워커라고 불릴 만한 독자들이 생겨났다.

    

 

 

 

 

 

 

 

 

 

 

 

 

 


 

 

 

* 이반 일리치 텍스트의 포도밭: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현암사, 2016)

    

평점: 4점   ★★★★   A-

 

 

* 에라스무스 외 공부의 고전: 스스로 배우는 방법을 익히기 위하여(유유, 2020)

 

평점: 3점   ★★★   B

    

 

 

12세기에 활동한 수도사이자 신학자인 성 빅토르의 후고(Hugh of Saint Victor)는 성서에 대한 주석을 많이 남겼다. 그는 성서와 철학 등의 학문을 공부하는 수도원 학생들을 위해 디다스칼리콘(Didascalicon, 교육론)이라는 책을 썼다. 사상가 이반 일리치(Ivan Illich)디다스칼리콘을 분석하여 옛사람들이 생각한 독서와 공부의 의미를 추적했다. 그가 쓴 텍스트의 포도밭디다스칼리콘을 재해석한 주석이라 할 수 있다. 암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후고의 훈계(?)를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독서와 공부의 기본적인 의미를 확인하여 나태해진 마음에 새기고 싶을 때 공부의 고전에 수록된 디다스칼리콘을 읽으면 된다. 공부의 고전공부를 주제로 한 옛사람들의 글 모음집이다. 이 책에 번역된 디다스칼리콘은 서문과 1, 3부의 내용 일부이다. 그래서 글의 분량이 많지 않다.

 

중세 이탈리아의 신학자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책을 만드는 사람을 4가지로 정의했다. 그 중에 하나가 주석가다.

 

 

 책을 만드는 데에는 네 가지 길이 있다. 한 가지도 보태거나 바꾸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적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은 서기(scriptor). 다른 사람의 말을 적으면서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뭔가 보태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편찬자(compilator)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말과 자신의 말을 모두 적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자료가 지배적이며 그 자신의 말은 설명하기 위한 부록처럼 덧붙인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저자라기보다는 주석가(commentator)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과 남에게서 나온 것을 모두 쓰되, 자신의 말을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남의 자료를 붙이는 사람은 저자(auctor)라고 부른다.

 

(텍스트의 포도밭163~164)

 

 

네 가지 유형 중에서 내가 선호하는 것은 주석가다. 나는 익명의 독자들에게 쓸모 있는 익명의 주석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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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2-07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알라딘에 오지 않는 동안 독서에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나
읽을 법한 책들을 읽으셨구만.
난 본문 읽기도 벅차서 주석 달린 책은 잘 못 읽겠더라구.
몇 줄 읽다가 번호찾아 주석 읽으면 흐름이 끊기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결국 읽다 포기하게 돼.
표정훈의 책 오래 전에 읽었는데 없는 걸 보면 누구한테 보내러렸나 보다.ㅠ

cyrus 2020-12-07 19:05   좋아요 1 | URL
책 본문을 주석과 병행해서 읽으면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해요. 그래서 요즘은 주석을 보지 않은 채 본문을 다 읽고 난 후에 두 번째 독서를 할 때 주석을 읽어요. 이러면 자연스럽게 한 권의 책을 두 번 읽게 되는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