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트레아몽(Lautréamont)의 《말도로르의 노래(Les Chants de Maldoror)》는 가장 난해한 문학작품 중 하나다. 우리는 이 작품을 ‘가장 난해한 시’ 아니면 ‘가장 난해한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 로트레아몽, 윤인선 옮김 《말도로르의 노래》 (달섬, 2020)
* 로트레아몽, 황현산 옮김 《말도로르의 노래》 (문학동네, 2018)
학자와 역자들은 《노래》를 여섯 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산문시로 보고 있지만, 그 속에 시의 기본 형식인 운율과 압운(rhyme)은 없다. 독자들이 보기에는 《노래》가 시처럼 보이지 않겠지만, 로트레아몽이 독보적인 산문시 세계를 일구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노래》는 프랑스 산문시 문학의 계보에 넣어야 할 작품이다.
* 보들레르, 황현산 옮김 《파리의 우울》 (문학동네, 2015)
* 보들레르, 윤영애 옮김 《파리의 우울》 (민음사, 2008)
초현실주의 운동을 이끈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이 평가했듯이 보들레르(Baudelaire)는 산문시를 문학 장르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보들레르 이전에 이미 산문시와 유사한 형식을 갖춘 글을 쓴 프랑스 작가들이 있었다. 보들레르는 요절 시인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Aloysius Bertrand)의 유고인 <밤의 가스파르(Gaspard de la nuit)>를 스무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프랑스의 음악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은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동명의 피아노곡을 만든다]. 그는 이 책을 ‘유명하다’고 불릴 만한 작품이라서 칭찬한다. 그리고 자신도 <밤의 가스파르>와 유사한 어떤 방식의 글을 시도한다. 그 글이 바로 《파리의 우울》이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우울》 헌사에서 자신의 꿈은 산문시를 쓰는 일이라고 언급했다.
우리 중 누가 한창 야심만만한 시절, 이 같은 꿈을 꾸어보지 않은 자가 있겠소? 리듬과 각운이 없으면서도 충분히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움직임과 상념의 물결침과 의식의 경련에 걸맞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면서 동시에 거친 어떤 시적 산문의 기적의 꿈을 말이오. (《파리의 우울》 민음사, 18쪽)
《말도로르의 노래》(달섬)에 지인들(출판업자와 경제적 후원자)에게 보낸 로트레아몽의 편지들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로트레아몽은 1869년 10월 말에 쓴 편지에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밀턴(John Milton), 사우디(Robert Southey), 뮈세(Alfred de Musset), 그리고 보들레르가 한 것처럼 악을 노래했다’고 밝혔다. 로트레아몽은 여섯 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노래》를 이미 다 쓴 상태였다. 인쇄 작업도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출판업자는 《노래》의 대담성과 잔인성이 검찰총장의 검열에 걸릴 수 있다면서 출판을 거부한다. 그래도 로트레아몽은 작품 출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글에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수정할 수 있다면서 보들레르의 시 부록을 보내달라고 출판업자에게 부탁한다. 로트레아몽은 다음 작품에는 ‘악’이 아니라 ‘선’, ‘희망’, ‘행복’을 노래하겠다고 밝힌다. 《노래》를 외면하고 기피하는 당대의 반응에 좌절감을 느낀 로트레아몽은 낭만주의 문학을 ‘끔찍한 궤변에 불과한 시적 탄식’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빅토르 위고(Victor Hugo), 뮈세 등의 선배 작가들을 ‘가냘픈 여자’, ‘항상 우는 흉내를 내는 연약한 문호’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은 1864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 시기에 열여덟 살의 로트레아몽은 자신이 태어난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를 떠나 프랑스의 왕립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로트레아몽의 학창 시절에 대해 자세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그래서 젊은 로트레아몽이 보들레르의 글을 읽으면서 영감을 얻은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작품을 쓰기 위해 보들레르의 글을 참고하겠다고 편지를 통해 밝혔으므로 보들레르와 로트레아몽의 문학적 교집합(“대도시 파리에서 우연히 만난 보들레르와 로트레아몽”)[주]에 대해서 논의해볼 수 있다. 아마도 로트레아몽은 풍기문란 혐의를 받아 검찰의 검열을 피하지 못한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의 명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노래》의 대담성과 잔혹성은 《악의 꽃》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로트레아몽은 1867년부터 파리에서 생활한다. 그해부터 그는 《노래》의 초고를 쓰기 시작한다. 로트레아몽이 산문시의 등장을 선언한 《파리의 우울》도 눈여겨봤다면 《노래》도 ‘리듬과 각운이 없는 시적 산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래》가 로트레아몽 생전에 출판되지 못한 바람에 ‘시적 산문의 두 번째 기적’은 일어나지 못했다. ‘시적 산문의 두 번째 기적’은 로트레아몽이 죽은 지 훨씬 지난 뒤에 나타난 20세기의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 일어났다.
[주] 원문은 로트레아몽의 시에 나오는 구절로 알려진 “해부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한 만남”이다. 이 구절은 초현실주의 미술의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문구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