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Chehov)가 만들어낸 인간의 모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그는 인간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의사였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모로아(Andre Maurois)는 “현대의 의사는 환자를 확실히 이해하려면 예술가가 돼야 하며 철학가의 지능과 소설가의 재주를 겸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체호프가 ‘현대의 의사’에 가장 적합한 작가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체호프는 의사였다. 모스크바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아내를 의학, 애인을 문학으로 비유하면서 자신의 삶을 규정했다. 그러나 병원 근무와 집필 생활을 병행한 삶은 체호프의 건강을 나쁘게 만든 원인이 된다. 작가로서 명성이 차츰 높아졌지만 젊은 시절부터 걸린 폐결핵은 평생 체호프의 건강을 위협했다. 결국 그는 1904년에 요양 생활을 하다가 사망한다.
* 안톤 체호프 《지루한 이야기》 (창비, 2016)
* [품절] 안톤 체호프 《귀여운 여인》 (시공사, 2013)
*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2009)
문학과 의학의 만남은 체호프의 죽음을 재촉했지만, 그에게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제공해주었다. 체호프가 남긴 수백 편의 소설 중에 생명과 죽음, 질병의 고통, 광기, 의사의 삶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있다. <6호실> 또는 <6호 병동>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중편소설은 체호프가 작가로서의 원숙기로 접어든 시기에 나온 작품이다. 시골 마을에 사는 정신병원 원장이 환자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환자로 몰리는 과정을 그렸다. ‘어느 노인의 수기’라는 부제가 있는 <지루한 이야기>는 죽음을 앞둔 학자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인식하는 과정을 그린 중편소설이다.
<지루한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체호프의 수작이라 할 수 있는데, ‘창비’에서 나온 《지루한 이야기》는 우리말로 번역한 이 작품을 실은 유일한 책이다. 표제작인 <지루한 이야기> 이외에 <검은 옷의 수도사>,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출판사의 책 소개 내용 중에 오류가 있다. <지루한 이야기>를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중편’이라고 소개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지루한 이야기>는 ‘따분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1965년에 처음 번역되었다. 최초의 번역 작품이 수록된 책은 문우출판사에서 나온 《러시아 문학 전집 2》이다. 그리고 1983년에 주우사의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인 《사랑스러운 여인, 지루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책은 체호프의 중 · 단편을 선별해서 모은 책이며 ‘사랑스러운 여인’은 <귀여운 여인>의 이명이다. 이듬해에 ‘주우세계문학전집’은 ‘학원세계문학전집’(출판사는 ‘학원사’)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간되었는데 역자나 수록 작품은 주우사의 책과 같다.
문우출판사의 《러시아 문학 전집》은 동완, 《사랑스러운 여인, 지루한 이야기》는 박형규가 역자로 참여했다(두 책 모두 단독 번역이 아닌 ‘공동 번역’이다), 두 사람 모두 1세대 러시아 문학 번역가다. 이미 두 차례 번역된 체호프의 작품을 ‘국내 초역’이라고 잘못 소개한 것은 책 소개 글을 만든 창비 출판사 측 또는 역자(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번역으로 유명한 석영중 교수)의 착오이다.